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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필, 단편소설

검은 머리카락을 안타까워하며 (惜青丝) : 张大威 - 4/4 (끝) 욕조를 깨끗이 닦고 십여 가닥의 검은 머리카락을 비닐봉지에 담았다. 이쪽저쪽 살펴보는데 , 갑자기 이 십여 가닥의 머리카락과 나와의 거리가, 이미 기나긴 명하(冥河:저승에 있는 강)를 건너버린 것 것 같은 거리감을 느꼈다. 검은 머리카락이 날려 떨어진 일은 이미 지난 일, 지난 일은 때때로 마치 한 마리 외기러기가 가을바람을 두드리는 것처럼 내 기억을 두드렸다. 하지만 두드려서 꺼낸 것은 맑고 투명한 잔잔한 파문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어지러운 구름과 흘러가는 물이었다. 버릴 것은 버리자. 이건 내가 무정해서도 아니고 머리카락이 무정해서도 아니다. 그저 세월이 이 모든 것을 연출했을 뿐이다. 아쉬운 작별이지만 역시 작별해야 한다. 그래서 신발을 신고, 내 신체를 진작 떠나버린 것들을 손에 들고 천천히 아래.. 더보기
검은 머리카락을 안타까워하며 (惜青丝) : 张大威 - 3/4 이번에 목욕을 하다가 머리카락이 빠진 일은 노(老:늙음)에서 비롯된 경고음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독(秃:대머리)에서 비롯된 경고음이라 할 수 있다. 대머리와 늙음은 일반적으로 늙는 게 먼저고 대머리가 나중이다. 나는 탈모에 대한 경고음이 휘파람 소리를 내자, 그때부터 탈모의 추세는 필연적인 것으로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 충분히 억제할 수 있는 추세라면 추세라고 부를 것도 없지 않은가? 베개, 마룻바닥, 책상, 이불, 주방, 화장실 ---- 내가 사용하고 있는 것들에 필연적으로 깜짝 놀랄 "유물"을 남기게 되었다. 원래 내 머리 위에서 꼿꼿이 서있던 검은 머리카락인데, 그들에게 "쉬어"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그들 중 몇몇 불안정한 분자가 "쉬어" 해버렸던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해산"이라 하.. 더보기
검은 머리카락을 안타까워하며 (惜青丝) : 张大威 - 2/4 물기를 닦으려고, 욕조에서 나오며 니는 가지고 올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지고 나왔다. 십여 가닥의 긴 머리카락은 따라 나오지 않았다. 그것들은 둥지를 잃어버린 새체럼, 가지에서 떨어진 나뭇잎처럼, 뿌리가 끊어진 쑥처럼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것들은 이미 내 두피를 대략 한 시간 전에 떠났다. 그것들의 질감은 지금 한 점 한 점 사라지고 있고, 광택도는 떨어지고 있다. 그것들은 시들고, 속이 비었으며, 침체되고, 메말랐다 ---- 온통 물에 잠겼지만, 그렇게 메말랐다. 윤택하다는 것은 생명의 특징이다. 이런 십여 가닥의 머리카락이 앞으로는 무수한 머리카락으로 바뀔 것이고, 내가 죽기 전에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노쇠(老衰)는 한 점 한 방울 쌓여서 만들어진다. 십여 가닥의 검은 머리카락이 날려 떨.. 더보기
검은 머리카락을 안타까워하며 (惜青丝) : 张大威 - 1/4 목욕을 하다가 문득, 고개를 숙이니 뜻밖에 십여 가닥의 검은 머리카락이 보인다. 욕조 수면에 이리저리 떠 다니는데 그것들 모양은 하얀 욕조 위에 검은색, 긁힌 자국 같다. 조용함에 대하여 흠집을 내고, 환각 ---- 자기가 한창나이 어린 청춘이라는 ----에 대하여 흠집을 내는데 나는 원망할 수가 없다. 세월에 따라 나날이 늙고, 사라져 가는 사람들 모두 자기를 속이려는 이런 환각이 있다. 이 십여 가닥의 머리카락은 계속 내 머리에 속했었다. 하지만 조용한 새벽, 그 어떤 징조도 없이 두피에서 떨어져 나가, 유랑하는 떠돌이 머리카락이 되기로 하고, 나를 버리고 갔다. "까마득한 맑은 꿈은 사라졌고, 거울 속 홍안은 바뀌었다. 봄이 떠나가니 부끄러움에 가득한 걱정이 바다 같다." 진관(秦观 : 북송시대 시.. 더보기
나의 구라 시대 (我的瞎话时代) 侯德云 - 끝 헌 신문지와 년화(年画) 제일 처음 "자(字)"를 보았는데, 헌 신문에서, 또 년화(年画:중국인들이 설날 집집마다 집안에 붙여놓는 그림)에서였다. 집안을 헌 신문지로 벽도 바르고, 천정도 발랐다. 바르고 난 다음, 벽에 년화를 붙였다. 이런 일은 음력 설 7~8일 전에 했다. 비록 가난한 집이라도, 벽과 천정을 신문지로 발랐다. 그리고 두 장의 년화를 붙였다. 집이 부유한 사람은 백지를 벽과 천정에 발랐다. 년화도 여러 장 붙였다. 도배를 하는데 제일 호화로운, 화지(花纸)를 사용했다. 알록달록해서 보고 있으면 경사스럽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아무도 비싼 시멘트를 쓰지 못했다. 백회도 과분했다. 집안은 모두 진흙 바닥이었다. 헌 신문지는 피코우(皮口) 진에 가서 샀다. 몇 푼(分: 1元의.. 더보기
나의 구라 시대 (我的瞎话时代) 侯德云 - 둘째 단원 2/2 나는 종(钟)씨 집에 가서 구라(瞎话)를 말했다. 꼬마 녀석이 말로 어른들을 온돌 위에 끌어당겨 놓은 것이다. 한 무리의 어른들이 나를 둘러싸고 얘기를 들었다. 나의 큰 외삼촌도 몇 마디 듣다가 갔다. 그때 큰 외삼촌은 어떤 것이든 기회를 찾느라 두리번거렸고, 그의 누나, 그러니까 바로 우리 엄마를 포함해서 우리 집안 모든 사람에 대해 무시하는 티를 내었다. 세째 외삼촌은 그러지 않았다. 셋째 외삼촌이 결혼하던 날도, 나에게 구라를 말해주러 오라고 청했다. 밤에 갔다. 방안은 온통 빨갯다. 커튼도 빨갛고, 이불, 요도 빨갛고, 셋째 삼촌댁도 빨갛다. 누가 나를 등을 밀어서 들어가게 했다. 일단 말을 하는데 셋째 외숙모가 나에게 과일 사탕을 한주먹 집어주었다. 누구인지, 다시 내 등을 밀었다. 가라, 셋째.. 더보기
나의 구라 시대 (我的瞎话时代) 侯德云 - 둘째 단원 1/2 등불 밑에서의 구라 (油灯下的瞎话) 시골 사람들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밤에는 일찍 잔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쉰다. 을 보지 않았는가? 이런 방법으로 양생 하는 것이다. 세월이 긴박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아무 일도 없는데, 등잔 아래서 무얼 하겠는가? 서둘러 자는 게 기름을 아끼고, 바로 돈을 아끼는 것이다. 집안에서 용돈을 조달하기는 쉽지 않다. 계란을 낳는 닭 궁뎅이에 의지할까? 해산물 줍는 것에 의존할까? 양계는 몇 마리 더 초과하면 안 되었다. 초과된 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길"이기 땨문이다. 해산물 줍는 것도 안된다. 소위 "해산물 줍기 (赶小海)"라는 것도 역시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것이다" 피코우 진에는 국영 어로장이 있었다. 그들은 대량의 어망이 필요했기 때문에, 어망.. 더보기
나의 구라 시대 : 侯德云 - 1966년에 태어나다 - 우리 집안에는 지독한 사람이 두 사람 있는데, 한 사람은 내 아버지요 다른 한 사람은 나다. 아버지는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에 우렁찬 울음을 터뜨렸는데 대청제국이 지리멸렬 무너진 해였다. 나는 1966년 4월 13일에 태어났는데, 출생 후, 한 달 조금 지나자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었고, 붉은 중국이 더욱 붉게 바뀌었다. 나의 출생지는 라오닝성(辽宁省), 뤼다시(旅大市) 씬진현 (新金县) 피코우 공사(皮口公社) 씨청(西城) 대대 카라팡 소대인데, 현대식 말로 하면, 랴오닝성, 따렌 시 후란디엔시 피코우 쩐 씨청촌 카라팡 거민조이다. 시골 사람들은 "거민조(居组组)"라는 말이 습관이 안돼 여전히 옛날 호칭을 답습하여 "툰(屯))"이라 부른다. 나는 정말 선택할 수도 있었는데..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