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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필, 단편소설

나의 구라 시대 (我的瞎话时代) 侯德云 - 둘째 단원 1/2

등불 밑에서의 구라 (油灯下的瞎话)

시골 사람들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밤에는 일찍 잔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쉰다. <황제 내경>을 보지 않았는가? 이런 방법으로 양생 하는 것이다. 세월이 긴박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아무 일도 없는데, 등잔 아래서 무얼 하겠는가? 서둘러 자는 게 기름을 아끼고, 바로 돈을 아끼는 것이다.

집안에서 용돈을 조달하기는 쉽지 않다. 계란을 낳는 닭 궁뎅이에 의지할까? 해산물 줍는 것에 의존할까? 양계는 몇 마리 더 초과하면 안 되었다. 초과된 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길"이기 땨문이다. 해산물 줍는 것도 안된다. 소위 "해산물 줍기 (赶小海)"라는 것도 역시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것이다"  피코우 진에는 국영 어로장이 있었다. 그들은 대량의 어망이 필요했기 때문에, 어망 짜는 실을 부근 농가에 나누어 주고, 그걸로 어망을 짜서 수공비를 벌게 했다. 생산대에게는 이 일을 허가하지 않았다. "큰 어망을 짜고, 작은 해산물을 줏자", 이런 것 모두 비판 대상이었다. 그때는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대상이 정말 너무나 많아서, 어느 집이나 자본주의가 다 있었지만, 아무도 실제로 몇 푼 자본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나중에 전등이 들어오자, 보편적으로 와트 수가 적게 나가는 것을 사용했는데, 15W는 "작은 전구"라고 불렀고, W가 많이 나가는 것은 "큰전구"라고 불렀다. 60W를 쓰면 큰일 났는데, 너무 밝아서 눈이 부셨다. 기껏 공장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만 겨우 "큰 전구"를 쓸 수 있었다. 둔(屯)에도 몇 집은 집안에 공장 노동자가 있었다. 그런 공장 노동자들은 농민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정전이 되면 언제나, 등잔을 사용해야 했다. 등잔에 쓰는 기름은 석유인데, 심지 끝이 까만 실로 싸여있었고, 그것이 기름 심지다. 석유등은 보통 갓이 있었는데, 우리 집에는 없었다. 점등할 때가 가까워지면 콧구멍이 까매졌다.

그 당시는 마실 가는 것이 유행이었다. 뒷길에 있는 종씨네 집(老钟家)이 꽤나 시끄러웠는데, 밤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 집으로 마실을 갔다.  잡담하고, 이것저것 말하고, 마누라 욕도 했다. 어떤 집에서는 밤에 누가 마실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밥을 먹고 나면  모두 일찌감치 종씨네 집으로  갔다. 말하자면, 쩨쩨한 이유인데, 자기네 집 기름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밤에 마실 가는 사람의 대다수는 남자였다. 여자는 적었다.

우리 집에  자주 오는 사람은 사실 단 한사람뿐으로, 동자 둘째 형이다. 그의 집안도 산동에서 왔다.  말하자면 둔 전체, 절대다수가 모두 산동에서 왔다. 오직 빨리 왔는지, 늦게 왔는지 차이만 있었다. 일찍 온 사람은 대청국 시절에 왔고, 늦게 온 사람은 중화민국 시절에 왔다. 나의 아버지와 동자의 아버지는 민국 시절에 왔으니 늦게 온 편이다. 두 집안이 늦게 왔으니 감정적으로 친했다.

인상에 남는 것은, 야참을 먹게되면, 큰 형과 식구들은 그림자도 안보였다. 집안에는 아버지, 엄마와 나만 남았다. 동자 둘째 형이 매일 오는 것은 아니었고, 아버지는 한 번도 마실을 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둔 안에서 약간 별종으로 보였는데, 일생 동안 산동 사투리를 바꿀 수 없었으며, 그것이 별종이라는 증거 중 하나였다. 

"빨리 자기(赶紧睡)" 라고 하면, 밥상을 물리고 바로 자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동자 들째  형이 오면  그에 게 집에 가라고 쫓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아무 말이라도 잡담을 해야 했다.

아버지는 등잔불 아래에서 나에게 구라치셨다.
지금 내가 알기로는, 구라의 뜻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거짓말, 헛소리"인데 <금병매>에 나온다. "아가씨는 믿지 않지만, 보옥의 몸을 말하자면, 이런 큰 병이 걸렸다는데,  어떻게 직접 일할 수 있단 말이오? 아가씨는 구라(瞎话)를 듣지 마시고, 안심하고 몸을 보존하는 게 낫지요." 
둘째는 화본(话本: 송대 생겨난 백화 소설의 이야기)으로, 옛부터 글 쓰는 사람은 구라가 많았다고 한다. 여기서 "구라, 설창문학(瞎话盲词)이라는 말이 생겨 났다.
이 두 가지 해석은 결코 완전하지 않다. 나는 "구라"가 넓게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화본에 의탁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꾸며 대는 것이다. 아버지가 나에게 한 구라는 화본에 의거했으면서도 화본이 아닌 것이다. 그가 글을 몰랐는데 어떻게 화본을 알 수 있었겠는가? 내가 그의 말에 사로잡혀 열심히 듣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구라를 꾸몄던 것일 뿐이다.

아버지는 나에게 얼마간 구라를 얘기했지만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언제나 되풀이했을 뿐이다. 오늘 말해놓고,  며칠 지나서 그 대목을 다시 말하는 것이다. 대다수는 "쑤에리(薛礼; 설인귀 : AD 614~683 당나라 장수)가 동부 지방을 정벌한 이야기"이다. 당대, 태종 때 일이다. 설인귀는 당태종 이세민의 중용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요동을 수복하였는데, 세 차례 고구려를 쳤다. 그래서 요동  남부  경계를 확정했고, 지금까지도 설인귀의 족적이 남아있다. 이 산의 바위에 움푹 파인 곳이 있는데, 말발굽 모양으로 파여있으니, 그것이 설인귀의 말발굽 자국이라고 했다. 저 산에는  돌 구유가 있는데, 그것도 설인귀가 말에 물을  먹이던 곳이라고 했다. 그 밖에도 어떤 산에는 설인귀의 병영이 있다는 둥..... 전설이 많다.

설인귀의 동부 정벌 이야기는 화본에 일부 나와있다. 지금 거리에 떠돌아다니는 민간 설화가 증거이다.

아버지가 말한 설인귀 이야기가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당시 들은 얘기 중 확실히 기억나는 게 있고, 전부 말해줄 수 있다. 아버지의 구라 중에는 동화도 있었다. 이것은 오히려 아직까지 기억난다.
한 서생이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다. 그는 쓰러져가는 사당에서 열심히 공부했는데, 서울에 가서 과거시험을 보려고 준비하는 중이었다. 어느 날  밤에 호랑이 정렁, 늑대 정령, 여우 정령  같은 것들이 몰려와서 서생은 너무 놀라 죽은 듯 숨을 죽였다. 호랑이 정령이 무어라 무어라 했는데 뜻밖에 사람의 말이었다.
"흠흠, 살이 있는 사람 냄새기 나네. 산채로 잡아서 가죽을 벗겨야지"
어떤 도사가 서생에게 대처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도사는 노란 콩을 볶이서 주머니에 넣어 두라고 했다. 밤이 되자 호랑이 정령이 뭐라고 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서생이 노란 콩을 우직 우직 씹자, 호랑이 정령들이 사당이 곧 무너지는 줄 알고 놀라서 휙휙  도망쳐 버리고 다시는 오지 않았다. 서생은 안심하고 공부하여 나중에 장원급제했다.
대충 이런 이야기다.

나는 호기심이 많았는데, 공부를 해서 장원급제했다는 것이 아니라 동물이 어떻게 사람 말을 하는지, 볶은 노란 콩이 어찌 그렇게 대단한지 하는 거였다.  내가 글을 알게 되자, <안델센> 동화를 읽고 비로소 동화는 모두 그런 식이고 어떤 것이나 모두 사람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단지, 아버지가 말해준 동화는 안델센 동화에 비해서 수준이 한참 떨어졌다.

아버지의 구라는 가치가 너무 적고, 우물우물 넘어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집안에 있지 않고 마실  다니는 걸 좋아하게 되었다. 좁은 데서  빠져나와 어른들 다리 틈에 까어 이리 처리 도망 다니게 된 것이다. 동자 둘째 형이 와도 나를 붙들어 매지 못핬다. 그는 구라를  칠 줄 몰랐고, 재미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