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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필, 단편소설

유배자의 하늘(流放者的天空) 鹏鸣 (五) - 1/4 홍양길이 가경황제에 의해 이리로 유배를 갔던 이후, 바로 뒤따른 사람은 국사관편수관, 보천국(조폐공사 해당 기관) 감독 기운사(祁韵士)였다. 기운사는 가경 9년 (1804), 보천국 동(銅) 부족 사건 때, 다른 사람의 무고로 체포되어 하옥되었다. 가경이 평생 제일 싫어한 것이 횡령, 수뢰범이었는데, 상소문을 보자 탁자를 치며 대노(大怒)하였다. 그는 바로 교지를 내려 보천국 감독을 역임한 사람들을 법에 따라 감옥에 가두고, 모두 죽을죄를 지었다고 단정하었다. 기운사의 이름도 그 명단 가운데 들어있었다. 기운사는 근면하고 학문연구에만 혼신을 다하는 바보 같은 책벌레였다. 비록 그의 품계가 그리 높지 않았지만, 그의 학식과 품덕(品德)은 모두가 익히 알았고, 많은 조신들이 탄복해 마지않았다. 수십 년 동안.. 더보기
유배자의 하늘( 流放者的天空) 鹏鸣 (四) - 3/3 우연한 기회에 홍양길은 이리 장군부에서 보녕이 가경에게 보낸 비밀 상소문 초안을 보게 되었다. 보녕은 상소문에서 황제께서 화풀이를 원하신다면, "대 불경죄"의 홍양길의 빈틈을 찾아내어 소리 없이 죽이겠다고 했다. 이리 장군의 지위는 높고 권한은 막중하여, 유배자 한 명쯤 몰래 죽이는 것은 파리 한 마리 죽이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다행히 가경제가 냉정을 되찾아, 답신에서 말하기를 '홍양길은 어리숙하고, 그저그런 부류의 인물이니 그렇게 까지 계책을 쓸 필요는 없다'라고 했다. 홍양길이 비록 담이 크고 식견이 뛰어나서, 결코 죽음을 두려위하지 않는다 하나, 그 비밀 상소문을 보고 나서는 춥지도 않았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많은 유배 온 관원들이 3년이나 5년이면 유배 기한이 끝나는데 홍양길의 유배는 돌아.. 더보기
유배자의 하늘( 流放者的天空) 鹏鸣 (四) - 2/3 환송 나온 사람은 수백 명에 달했다. 차마(車馬)가 도로를 꽉 막을 정도였다. 이는 홍양길의 인격이 얼마나 호소력이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 일은 당시 조정을 뒤흔드는 큰 사건이었다. 가경제가 환송객 속에 숨어 엿보도록 밀정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는 홍양길의 영향력을 끔찍이 싫어했다. 때가 되자, 홍양길을 압송하는 마차가 바로 출발했다. 북경을 떠나, 멀면 멀어질수록 좋았는데, 황제의 변덕이 언제 발동해서 밀지를 내려 홍양길을 죽여 화풀이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다가 서다가 하면서, 홍양길은 바오딩(保定)에 도착했다. 그는 황제가 이리장군 보녕에게 매일 800리씩 가는 , "미친 이동"을 지시했다는 풍문을 들었다. 또 보녕의 책임 하에 죄를 범한 관원 홍양길을 절대 온정적으로 대하.. 더보기
유배자의 하늘( 流放者的天空) 鹏鸣 (四) - 1/3 혜원성이 신강(新疆)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된 후, 조정은 전국 각지 및 신강 경내에서 이리하(伊犁河) 계곡으로 대규모의 군대 이동과 이민을 실행하였다. 혜원성은 "풍광이 곡우(4월 20일 전후) 때 특히 이름답다. 사과꽃이 피고, 갓 싹이 난 찻잎이 향기롭다"라고 하는 작은 강남이라 할만했다. 이리(伊犁)는 이미 닝구타(宁古塔)를 대신하여, 유배의 요지가 되었다. 건륭제 말기에 이르기까지 3~4천 명의 범죄자가 보내졌고, 유배된 관원도 수백 명이 넘었다. 그중에는 봉강대사(封疆大使)에서 주부현위에 이르기까지 각 직급의 관원이 빠짐없이 모두 있었다. 그들은 혜원성과 그 주변 지역에 모여 살았는데, 하나의 특수 집단이 형성되었으며, 현지 습속과 어우러진 하나의 독특한 유배문화가 생겨났다... 더보기
유배자의 하늘( 流放者的天空) 鹏鸣 (三) - 3/3 등정정(邓廷祯)은 임측서를 위해 사전에 토방 두 칸을 빌려놓아서, 임측서는 거기에 행장을 놓아두고 잠시 쉬었다가 바로 이리장군부(伊犁將軍府)에 가서 이리장군 포안태(布顔泰)를 방문했다. 신장 최고 행정장관이 될 사람은 모두 황제의 깊은 신임을 받아야 가능하다. 이리로 유배당해 오는 사람들은 대다수 조정에서 인심을 못얻었거나, 황제가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인데, 만일 그런 종류가 아니라면 그는 특별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이리 장군은 황제를 대신해서 이들에게 화풀이를 해야 한다. 즉 감독관을 다그쳐서 죄천된 관리 혹은 파직된 관리들의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를 엄하게 감시토록 해야 한다. "육체를 힘들게 하고, 배가 고프게 한다"를 체험토록 해야지, 연민이나 동정의 마음을 갖고 있으면 안되는 것이다. 임측.. 더보기
유배자의 하늘( 流放者的天空) 鹏鸣 (三) - 2/3 임측서가 탄 마차가 천하제일관문 가욕관(嘉峪关)에 도착했다. 가욕관은 웅장한 만리장성 서쪽 끝, 종점에 우뚝 솟은 가욕산(嘉峪山) 산록에, 웅장하고 기세 등등하게 서있다. 이곳은 고대 만리장성 방어선 상의 중요한 군사요새이며, 하서(河西) 제일의 요충지로, 고대 "실크로드"에서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관문이었다. 임측서 일행의 마차가 막 관문을 지나자 얼룩덜룩한 육중한 문이 우릉우릉 소리 내며 닫혔다. 임측서가 뒤돌아 보니, 벌써 문은 꽉 닫혀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오르며 슬퍼졌다. 그는 마치 퇴로가 끊겨버리고, 생사가 막막해진 것같이 느꼈고, 슬픔과 처량함에 시를 읊었다. 말 탄 사람 하나 들어오자마자 문이 닫히는 구나, 중원을 돌아보니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네. 부인마저 내버리고 가는 내 .. 더보기
유배자의 하늘( 流放者的天空) 鹏鸣 (三) - 1/3 청군(淸軍)은 아편전쟁에서 패배했다. 평범한 자질의, 도광(道光) 황제는 분하고 답답했다. 그는 분노를 임측서에게 돌렸다. 그는 임측서를 엄중히 문책, 신강(新疆) 이리(伊犁)로 유배시켜, 진정으로 속죄하도록 했다. 당시 56세 였던 임측서가 유배 길에 올라, 서안까지 갔을 때, 그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지쳤고, 병이 나서 일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그의 처와 아들들이 계속 그와 동행하며 밤새워 그를 보살폈다. 두 달간 몸조리시키고 쉬게 하니, 겨우 다시 유배길에 오를 수 있었다. 바른 도리에는 인심이 따른다. 관가라는 무대는 가장 전형적인 명분과 이익을 다투는 현장이다. 서로 속고 속이기도 하고, 편협하기도 하고, 세력에 빌붙기도 하며, 매일 같이 각박한 세태와 메마른 인정을 연출한다. 하지만 도의(道义).. 더보기
유배자의 하늘( 流放者的天空) 鹏鸣 (二) - 2/2 저명한 학지이자 보천국(宝泉局 ; 淸代 화폐 제조국) 감독이었던 기운사(祁韵士 : 1751~1815)는 보천국 동(銅) 부족 사건에 연루되어 다섯 명의 동료와 함께 하급관리로 이리(伊犁)에 강등, 유배되었다. 그는 과일 계곡을 지나다가 문득, 시심이 일어 시(詩) 를 짓고, 경탄하며 말했다. "높이 솟은 만개의 봉우리가 하늘에 닿아있고, 푸른 계곡은 구비구비 돌아 흐르네. 72개의 다리를 아직 지나지 못했는데, 유천(流泉)은 벌써 석양아래 점점 사라지고 있데." 문인 관리들이 유배를 당하게되먼, 계속 가슴을 졸이다가, 제일 처음 느끼는 것은 황공하고 불안함이다. 이렇게 걱정과 두려움을 받아들이게 되면, 다음으로 상심과 절망, 이어서 슬픔과 애탄을 느끼게 되고, 그런 다음에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