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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필, 단편소설

나의 구라 시대 : 侯德云

 

- 1966년에 태어나다 -


우리 집안에는 지독한 사람이 두 사람 있는데, 한 사람은 내 아버지요 다른 한 사람은 나다. 아버지는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에 우렁찬 울음을 터뜨렸는데 대청제국이 지리멸렬 무너진 해였다. 나는 1966년 4월 13일에 태어났는데, 출생 후, 한 달 조금 지나자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었고, 붉은 중국이 더욱 붉게 바뀌었다.

나의 출생지는 라오닝성(辽宁省), 뤼다시(旅大市) 씬진현 (新金县) 피코우 공사(皮口公社) 씨청(西城) 대대 카라팡 소대인데, 현대식 말로 하면, 랴오닝성, 따렌 시  후란디엔시 피코우 쩐 씨청촌 카라팡 거민조이다. 시골 사람들은 "거민조(居组组)"라는 말이 습관이 안돼 여전히 옛날 호칭을 답습하여 "툰(屯))"이라 부른다. 나는 정말 선택할 수도 있었는데, 북경, 상해에서 안 태어나고, 소주, 항주에서 안 태어나고, 혁명 간부 집안에서 안 태어나고, 선비 가문에서 안 태어나고, 하필이면 시골구석  촌티가 물씬 나는 툰(屯)에서 감지덕지 2대째 농사짓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옹색하게 말하자면, 그건 희생정신이 있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설령 피코우 시 일개 공장 노동자 가정에  태어났어도 그런대로 좋다. 그런데 어째서 하필-----  그때, 피코우공사(皮口公社)와 피코우 진(皮口镇)이 두 개의 평행한 당정(党政)을 세우고 다투다가 나중에 외서야 합병하여, 피코우 진이 되었나? 진(镇) 안에 사는 사람들은 "비농호(非农户)"에 속해서 상품 양식을 사 먹어야 하고, 시 밖에 사는 사람은 농민이니 땅에서 양식을 만들어 먹어야 했으나, 때때로 훨씬 배 부르지 못하게 먹엤다.

내가 인간세상에 왔을 때, 나를 영접한 것은 한 장의 거친 마대 자루였다. 나의 강보는 생뚱맞게 마대자루였던 것이다. 아이고 마대자루라니!

그들은 마대자루로 나를 감쌌다. 그들의 가난이 무슨 이런 모양까지 만든 거다.

여러 해 지나서야 나는 이 일을 알게 되었다. 적어도 40세 전후에야 알게 된 것이다. 그걸 사촌 형수가 알려주었다.  우리 아버지의 형인  ---- 나의 큰아버지 집안의 며느리다. 사촌형수의 아들은 나보다 한 살 많지만, 나를 삼촌이라 부른다.

큰아버지 집안은 협하진 (夹河镇)에 살았다. 나는 나중에 와팡디엔 이라는 소도시에서 일했는데, 고향  피코우에 가려면 협하진을 지나야 했다. 때때로 가는 김에 사촌 형과 형수를 보러 갔다. 그때, 큰아버지, 큰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해, 설  전에 내가 사촌형수 집에 놀 퍼갔을 때, 가난했던 시절 얘기를 나누던 중, 형수가 말했다. "그 시절, 도련님네 집이 어찌나 가난했던지, 온돌 위에 까는 자리도 없었어 -----  그때 도련님이 태어났지 뭐야. 그래서 마대자루로 감쌌는데, 이런 거 알기나 해?"
내가 어찌 알겠는가? 아무도 얘기해 준 사람이 없었는데.
나는 의심이 번쩍 들었다. 내 성격이 종종 거칠고 사나운데 그게 혹 마대와 관련 있을까?
바로 그날, 사촌형수는 나에게 그녀의 "사랑이야기"를 해주었다.

사촌 형수는 산동 (山东) 어느 곳에서 랴오닝(辽宁) 반도로 시집왔다. 내가 태어나기 2년 전이다. 나의 큰아버지, 큰어머니 우리 아버지를 포함해서 모두 산동에서 동북지방으로 도망 왔다. 소위 "창관동 (闯关东: 허베이나 산동 사람이 산해관을 넘어 동쪽 지방으로 나 오는 것을 말함)"이다.
사촌 형은 키가 아주 작았다. 이 때문에 현지에서 며느리를 못 얻게 되자 산동 고향으로 색시감을 낚으러 갔다. 여기서 형수가 낚인 것이다.

그때 형수는 18세였다.
형수가 말했다. "듣기 좋게 말해서 시집왔다고 하는 거지, 사실은 우리 어매가 나를 팔아버린 거야,  60元에."
기억하기로, 1960년대는 형세가 조금 좋은 것이 아니라 많이 좋았는데도, 산동 지방에서는 여전히 여자 아이를 팔았던 것이다.
사촌 형이 산동으로 형수를 데리러 갔는데, 형수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했다." 만나보니, 맘에 안 들어. 그렇게 키가 작으니 키 큰 사람이  만질 수도 없고, 키 작은 걸 다시 키울 수도 없는데 어떻게 그 사람이 맘에 들겠어?"
형수는 어매에게 성질을 부리며, "안 가요, 안가. 안 간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어매에게  "그렇게 좋으면 어매나 그 사람 따라가세요"라고 했다.
어매가 화가 나서 몽둥이로 그녀를 때렸다. 그녀는 문 밖으로 도망쳤지만 다시 잡혀와서 계속 맞았다. 실제로 더는 어쩔 수 없어서 그녀는 사촌 형을 따라나서는데 동의했다.

산동 어느 곳에서 랴오닝 남쪽까지  오기 위해, 두 사람은 어느 때는 걷고, 어느 때는 차를 타고, 어느 때는 배를 탔다. 걸어 갈 때는 한 사람은 길 왼편으로, 한 사람은 길 오른편으로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걸었다. 두 사람 다 서로 꼴 보기 싫었던 것이다.

사촌형수가 설명하는 가운데 중요한  구체적인 사정이 드러났다. 산동 어느 곳에서 랴오닝 남쪽(辽南) 어느 곳까지 오는데 차비, 선비 모두 합해서 두 사람이 쓴 돈이 삼元오角이었다. 말하다 보니, 당시 사촌 형이 형수를 사는데 쓴 돈, 60원이면 큰돈이었다.
요남에 다다르자, 형수는 사촌 형과 결혼하는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갈 데도 없지, 죽자니 무섭지, 도대체 무슨 방법이 있어야지!"
아! 사촌 형수의 "사랑"은 나의 마대자루보다 훨씬 거칠었다.

다시 고향에 오자, 나는 마대자루 사건에에 대해 묻고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에게 물으니 인정하지 않았다. 큰형에게 물으니, 마대는 무슨 마대, 기억도  안 난다고 했다. 그런데 말을 하고 나서 히히 웃었다. 큰형은 나보다 스므살이나 많은데, 그가 어째서 기억이 안 난다고 할까? 그의 웃음 속에 사연이 숨겨 있는 거다.

마대자루 사건을 실증해 보려던 일은 끝났다. 정말이다. 나는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찌 가난한지 알음 묵에 깔아 놓을 자리마저 없지 않아!" 이 말은 진짜다.
당시 형세가, "조금 좋은 게 아니라, 크게 좋았다",라고 하지만 우리 집은 그렇게 가난했던 것이다.
그렇게 가난한 집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그렇게 가난한 시절에 어찌 아이 낳는 것을 장려할 수 있나?

나는 이 세상에 내가 있던 없던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다.
내가 없어도 상관없다. 내가 있다고 해서 누구에게 감사하지도 않는다.

이건 내가 화가 나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너에게 말해주는데, 만약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한 마리의 새. 작은 새라도 좋다, 깊은 산 족 늙은 나무 가지에 앉아 짹짹 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