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 수필, 단편소설

유배자의 하늘( 流放者的天空) 鹏鸣 (三) - 3/3

하서주랑 (황하)

 

등정정(邓廷祯)은 임측서를 위해 사전에 토방 두 칸을 빌려놓아서, 임측서는 거기에 행장을 놓아두고 잠시 쉬었다가 바로 이리장군부(伊犁將軍府)에 가서 이리장군 포안태(布顔泰)를 방문했다.

신장 최고 행정장관이 될 사람은 모두 황제의 깊은 신임을 받아야 가능하다. 이리로 유배당해 오는 사람들은 대다수 조정에서 인심을 못얻었거나, 황제가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인데, 만일 그런 종류가 아니라면 그는 특별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이리 장군은 황제를 대신해서 이들에게 화풀이를 해야 한다. 즉 감독관을 다그쳐서 죄천된 관리 혹은 파직된 관리들의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를 엄하게 감시토록 해야 한다.
"육체를 힘들게 하고, 배가 고프게 한다"를 체험토록 해야지, 연민이나 동정의 마음을 갖고 있으면 안되는 것이다.

임측서는 좌불안석으로 불안해하면서 포안태를 만났으나, 뜻밖에 예우와 마음에서 우러난 환대를 받았다. 다음날, 포안태는 사람을 보내어, 쌀국수, 소고기 양고기, 닭과 기러기 등 을 임측서에게 보냈다. 또한 본인이 임측서가 기거하는 집 문을 넘어, 직접 방문했으며, 체럭이 다한, 조정이 포기한 "쫓겨난 신하" 신세였던 임측서의 생활을 여러 가지로 도와주어서, 임측서는 깊은 감동과 위로를 받았다. 임측서는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포안태를 칭찬했는데, "학식이 풍부하고 행동거지가 의젓하며, 공무 역시 통달한 인재"라고 했다.

포안태는 임측서를 정중하게 대했을 뿐만 아니라 자상하게 돌보아 주었는데, 임측서에게 실무---- 양곡, 급여처의 일을 위임해주어 임측서가 신강에서 입지를 굳히고 여러 가지 편리 늘 제공받게 해 주었다. 이것은  그에게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어, 국가와 서민을 행복하게 하는 일을 하도록 해 준 것이다. 포안태는 활달하고, 통이 큰 사람이어서, 이리로 "진실로 속죄"하기 위해 유배 온 파직 관리들을 잘 대해 주었으며, 그들을 위해 각종 기회를 제공하고,  그들의 장기(長技)를 이용해 공을 세워 죄를 감하게 했으며, 조정에 그들이 서북지방에 와서 일한 공적을 보증해 줌으로써, 그들이 조기에 내지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포안태의 유배자에 대한 태도는 몇몇 사람들의 비난을 촉발했다. 그들은  "포안태와 임측서가 너무 친하다"라고 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포안태를 비방했다. 임측서가 이 소식을 듣고, 포안태를 걱정하는 동시에  이를 엄히 나무랐다. "그들의 말은 모두 사심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말은 바로 원한 있는 사람에게나 할 일이니 고쳐 주었으면 감사하겠다"

이리 장군의 유배 관원들에 대한 선처는 결코 처음있는 일이 아니었고 이미 하나의 풍조로 굳어진 일이었다.
고증에 의하면, 이리장군이 유배자에 대하여 너그럽게 우대해주는 풍조는 전승된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 상호 간에는 믿고 신뢰하고, 총명한 사람끼리 서로 아껴주는 일종의 얻기 힘든, 조화로운 사회가 생겨났다. 그들은 중지를 모아 대책을 세우고, 협력했으며, 사심 없이 봉사했고, 현지의 군사, 농업, 수리, 문화 등 여러 방면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이리 장군 중에는 큰 공을세운 사람이 드물지 않다. 예를 들어 처음 장군에 임명된 명서(明瑞)는 마음을 다해 이리 지역의 둔전을 계획하고, 초소를 세워 지키고 순찰하는 일에 전념했다. 두 번이나 이리 장군에 임명되었던 아계(阿桂)는 이리 둔(屯) 개간의  창시자였으며, 사역덕은 후얼지아 하(河) 동쪽 땅 얼구터와 허스터부를 적절히 안치시켰다. 송균(松筠)은 두차례 이리장군에 임명되었는데, 만영기둔(满营旗屯)을 개설하고 유배 관원 기운사(祁韵士), 서송(徐松) 등을 중용하여, 세지서 <서수총통사략> <서역수도기> 등 중요한 사적(史籍)들을 편찬하였다. 창링은 군대를 지휘하여 장거얼의 난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포안태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변방을 순찰했으며 코칸트 군(軍)이 침범한 것을 쫏아냈다. 또한 임측서를 잘 대우했으며, 이리와 남강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둔전으로 만드는 새로운 국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