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성이 신강(新疆)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된 후, 조정은 전국 각지 및 신강 경내에서 이리하(伊犁河) 계곡으로 대규모의 군대 이동과 이민을 실행하였다. 혜원성은 "풍광이 곡우(4월 20일 전후) 때 특히 이름답다. 사과꽃이 피고, 갓 싹이 난 찻잎이 향기롭다"라고 하는 작은 강남이라 할만했다.
이리(伊犁)는 이미 닝구타(宁古塔)를 대신하여, 유배의 요지가 되었다. 건륭제 말기에 이르기까지 3~4천 명의 범죄자가 보내졌고, 유배된 관원도 수백 명이 넘었다. 그중에는 봉강대사(封疆大使)에서 주부현위에 이르기까지 각 직급의 관원이 빠짐없이 모두 있었다. 그들은 혜원성과 그 주변 지역에 모여 살았는데, 하나의 특수 집단이 형성되었으며, 현지 습속과 어우러진 하나의 독특한 유배문화가 생겨났다.
도광제의 아버지인 가경제(용염 颙琰 : 가경제의 이름)는 성깔이 대단해서 걸핏하면 관원들을 유배 보냈다. 그는 그가 태자로 책봉한 도광제의 온, 양, 공, 검, 양 (温良恭俭让: 부드러움, 선량함, 공손함, 검소함, 겸양)과는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어떤 사람의 분석에 의하면, 용염의 아버지 건륭제는 큰 일을 벌이고 공적을 내세우는 것을 좋아했으며, 황권을 휘두르기를 매우 좋아하여, 재위 60년간 느릿느릿 제위를 내주지 않았다. 용염은 도리없이 그저 사소한 일에나 신경 쓸 수밖에 없어서, 꼬리를 내리고 일을 처리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가경(嘉慶)이 친정을 시작한 후, 제일 하고 싶었던 일은 바로 건륭제의 영향에서 벗어나, 힘을 보여주고 위세를 떨쳐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매섭게 화를 내고, 보기에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누구나 바로 치워버렸다.
가경제 재위 20여년 간, 무슨 큰 업적도 없었고, 그가 제일 공들인 일은 바로 신료들에게 화를 내는 일이었다. 하나... 둘, 연이어 "황제를 우습게 보았다"는 죄를 진 관원들이 유배당했는데, 그중에는 세명의 이름이 쩡쩡 울리는 문화인이 있었다. 그들은 개인으로서는 비록 큰 불행을 맞았지만, 이리를 위해서는 웅대하고 아름다운 시편과 매우 진귀한 변경, 신강의 역사, 지리에 대한 전문 저작을 남겼다.
첫 번째, 성대하게 무대에 나가 만천하에 이름을 날린 사람은 건륭, 가경 학파 학자인 당시 조정의 한림원 관리, 홍양길(洪亮吉)이었다. 그는 상소를 올린 일로 가경의 용안이 벌게지도록 진노케 했고, 바로 체포되어 감옥에 갔다. 삼당회의는 심사 후, 홍양길에게 "대 불경죄"를 판결하고, "즉시 참수"를 결정했다. 결정 후, 목을 베는 형을 집행하기 위해 가경의 최종 명령을 기다렸다.
사건이 나자, 친우들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서 어리벙벙했고, 슬프고 근심이 가득한 가운데 그와 결별하게 되었다. 강남의 재사 홍양길 스스로 알기에도 흉한 것은 많고, 길한 것은 적었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기쁜 얼굴을 하고, 웃으며 즉흥시를 한 구절 읊었다.
"장부는 자신있게 말한다, 모가지야 잘 있지? 조정이 칼을 한방 먹일 거야"
미친 사람의 강경한 기세는 말에 니타난, 범위 밖으로 흘러넘쳤다. 그의 고향 사람 김성탄(金聖嘆)이 형의 집행에 임박해서 태연자약하게 시를 읊었던 일과 비교된다.
모두들 강남선비의 문약함을 말하지만, 그들의 기골은 때로는 북방 문인보다 훨씬 단단하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경제는 갑자기 생각을 바꾸어 유지를 내렸다. "너그러이, 죽음을 면하게 하여, 이리로 보내는 것으로 바꾼다. 이리장군 보녕(保寧)에게 엄히 관리 단속토록 지시하라."
'이제 죽었구나' 하는 절망적인 생각을 하고 있던 홍양길은 황제가 각별히 은혜를 베풀어 자신의 죽을 죄를 면제해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울렁거려 시를 읊었다. "사람들은 한직에 있는 관리가 법망을 벗어나는 걸 보고 웃지만, 하늘은 뜨거운 피를 주변 먼지에 뿌리라고 가르친다."
아! 신강, 이리로 유배가는 것은 고통스럽겠지만, 어쨌든 한가닥 생명은 주워 올 수 있는 것이다.
홍양길은 가경4년(1799) 8월 25일 "5000자 상소"를 올렸고, 8월 28일 끝없는 유배길에 올랐다. 아주 짧은 날자 안에 홍양길의 운명에 경천동지 할 변화가 발생한 것이어서 어안이 벙벙하게 한다. 학자 양겸은 <유배의 길>의 글 중에 홍양길의 경우를 정확하게 묘사했다. 그가 개탄한 것은 "봉건사회 혹은 법제 사회를 불문하고 한 사람의 중임을 맡은 관원이 3-4일 내에 바로 죄를 받고, 바로 판결이 집행된 사례는 정말 보기 힘들다."
가경 4년 8월 28일, 매우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 왕래가 끊이지 않는 북경, 양향 역으로 중죄를 지은 홍양길을 배웅하려고 모여들었다. 북경에 있는 건륭, 가경 학파 문인, 학자들이 모여 홍양길을 전송하면서 무슨 좋은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뛰어난 사람들끼리 서로 아끼는 마음에서가 아니던가!
전에는 서로 몰랐고, 교제한 적이 전혀 없던 만주족 관원----- 호부 주사 성격(成格)은 보통 사람은 생각지도 못할 일을 했다. 그는 전송을 나와 준 것 뿐만 아니라, 두둑한 후의를 준비했다. 홍양길의 여비에 쓰라고 순 은(銀) 300량을 준 것이다. 꼭 알아야 할 것은, 이 돈은 그가 집문서를 저당 잡히고 빌려온 돈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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