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넓고 두터운 높은 담 앞에 서 있었다.
담은 우리를 서북풍에서 가려주었고, 우리를 상대적으로 따뜻한 환경에 있게 해 주었다.
우리의 좌우 양편에는 우리들과 똑같이 움츠리고 있는, 얼굴이 누렇게 뜨고 몹시 수척한, 또 똑같이 후들후들 떨고, 똑 같이 배고픔과 추위에 고통 밭는 사람들이 있었다.
남자와 여자.
부녀자와 아이들.
남자는 모두 늙어서 아무 짝에도 쓰지 못할 영감들이고, 태반이 장님인데, 장님이 아니면 두 눈이 빨갛게 붓고 짓물러 있었다.
그들 옆에는 서있거나 쪼그리고 앉은 아이가 하나씩 있었는데, 남자아이 혹은 여자 아이였다. 이들은 사실 남자애인지 여자 애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모두들 굴뚝에서 나온 것처럼, 연탄같이 까맣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모두들 뒷목에 풀을 꽂았는데, 태반은 볏짚을 꽂고 있었지만, 시들어서 누런 나뭇잎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을을 떠올렸고, 캄캄한 밤에 말이 짚을 씹을 때의 향기와 사람과 말을 모두 유쾌하게 해주는 소리를 떠올렸다.
어디서 뽑았는지 모르는 제멋대로 뽑은 들풀들, 개꼬리풀, 나귀꼬리풀을 꽂은 사람도 있었다.
부녀자들은 태반은 모친처럼, 옆에 빼곡히 아이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모친처럼 옆에 많은 아이들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여인 옆에 있는 아이들은 전부 풀을 꽂고 있었고, 어떤 여인 옆에 있는 아이들은 일부만 풀을 꽂고 있었다.
아이들이 꽂고 있는 풀은 태반이 볏짚이었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누렇게 마른 나뭇잎을 꽂고 있어서, 가을의 냄새와 낱알의 향기를 풍겼다.
풀을 꽂은 아이들의 머리에는 말, 노새, 당나귀의 묵직하고 커다란 머리에 다는 구리방울 같은 큰 눈이 흔들거렸고, 가지런한 하얀 이빨이 나 있었으며, 음탕하고 두터운, 꺼칠한 털이 난 입술사이에서 하얀 이빨이 반짝였다.
오직 흰옷을 입고 머리에 흰머리띠를 매고, 안색이 창백하고, 눈두덩이와 입이 파란 여자만 예외였다. 그 여자 옆에는 아이가 없었다.
그녀는 외롭게 혼자 담장밑에 서서, 목에 꽂아야 할, 가지까지 있는 개꼬리풀을 손에 들고 있었다.
하얀 판잣집 부근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여인의 날카로운, 욕하는 소리는 칼날처럼 공기와 햇볕을 갈랐다.
두 여인이 우물 둔덕에서 엉겨서 싸웠다.
하나는 빨간 바지를 입었고, 하나는 초록 바지를 입고 있었다.
빨간 바지를 입은 여인이 초록바지를 입은 여인의 얼굴을 쥐어뜯었다.
초록바지의 여인은 빨간 바지여인의 가슴에 주먹을 날렸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은 모두 뒤로 몇 발작 물러서서, 사나운 짐승처럼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비록 그녀들의 시선을 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녀들의 시선을 본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왠지 모르게 그녀 둘의 시선이 우리 큰 누나 상관라이디와 둘째 누나 상관자오디와 같을 거라고 여겼다.
별안간 그녀들은 투계같이 상대방을 향해 튀어올라 부딪쳤다.
그녀들은 잘 익은 밀밭 속을 달려가던 개들처럼 머리가 오르내렸다.
팔뚝을 휘두르고, 유방이 엇갈려 날고, 튀어 흩어지는 침방울은 무리 진 딱정벌레 같았다.
빨간 바지 여인이 초록바지 여인의 머리칼을 잡자, 초록바지 여인도 손을 뻗쳐 빨간 바지 여인의 머리칼을 잡았다.
빨간 바지 여인이 머리흘 숙인 김에 초록바지 여인의 왼쪽 어깨를 물었다. 거의 동시에 초록바지 여인도 빨간 바지 여인의 왼쪽 어깨를 물었다.
그녀들의 기세는 막상막하였다. 힘도 서로 비슷해서 우물 둔덕 위에서 서로 지지 않고 밀쳤다 밀렸다 했다.
다른 여인들은, 어떤 사람은 문가에서 담배를 피우며 멍하니 앉아있었고, 어떤 사람은 돌멩이 위에 웅크리고 앉아 이를 닦으며, 입을 헹구느라 하얀 거품을 뱉고 있었으며, 어떤 사람은 손바닥을 치며 깔깔대며 웃었고, 어떤 나람은 철사 줄에 길고 투명한 스타킹을 널어 말리고 있었다.
판잣집 앞에 있는 원형의 커다란 돌 위에는 신체가 똑 바르고, 눈부신 까만 승마화를 신은 사람이 등나무 줄기를 들고, 왼쪽으로 한번 내리쳐 '휭' 소리를 내고, 오른쪽으로 한번 내리쳐 '휭' 소리를 냈다.
그는 등나무 줄기를 칼 삼아, 검술을 연습하고 있었다.
한 떼의 남자들이, 몇 명의 배가 나온 키 작은 사람들을 십 수 명의 배가 없고 삐쩍 마른 키가 큰 사람들이 에워싸고, 서남방 깃발에서 걸어 나왔다.
배 나온 사람의 웃음소리는 끼룩끼룩하는 새 울음소리와 똑같았다.
"끼룩 끼룩 끼룩---- 끼룩끼룩끼룩 ----" 이 사람의 특이한 웃음소리가 내 귓전에서 메아리치며, 나에게 우물가의 정경을 회상하게 했다.
배 나온 사람과 그를 따라온 사람들이 판잣집을 향해 걸어오자 끼룩끼룩하는 새 울음소리가 점점 똑똑히 들렸다.
돌 위에서 검술을 연습하던 사람은 돌에서 뛰어내려와, 슬금슬금 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떤 뚱뚱하고 키 작은 여자가 건들건들 우물 둔덕을 향해 돌진해 왔다.
그녀는 발이 어찌 작은지 아예 발이 없는 것 같았고, 그녀의 작은 다리가 직접 땅에 꽂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연근같이 살찐 두 팔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빠르게 앞으로 뛰어 온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가 오는 속도는 대단히 느렸다.
그녀의 신체가 발산하는 마력(马力)은 대부분 몸을 흔들고 살을 떠는데 소비되었다.
일백 미터 떨어진 거리 --- 아마 일백 미터는 안될 것이다---- 에서도 우리는 그녀의 헐떡 거리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녀가 분출하는 수증기가 그녀의 몸을 에워싸고 있어서, 마치 그녀가 목욕탕에서 샤워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결국 우물가까지 뛰어왔다.
그녀의 욕하는 소리는 그녀 스스로 내는 헐떡임과 기침소리로 하나하나 잘게 갈라져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토막말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그녀가, 물고 뜯는 두 여자들의 대장이고, 그녀가 우물가로 달려와 욕을 하는 목적은 그녀들을 떼어 놓으려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개 이빨처럼 얽혀 있었고, 매와 새매가 싸우는 것처럼 발톱이 서로 엉켜있어서 떨어져 갈라지기 어려웠다.
그녀들은 하나가 달려들면 하나가 뒷걸음치고, 하나가 뒷걸음치면 하나가 달려들고, 해서, 여러 번 우물 속으로 빠질 뻔했다.
하지만 끝내 우물에 빠지지 않은 것은 도르래가 그녀들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뚱뚱한 여인이 그녀들을 뜯어말리려다, 오히려 그녀들에 부딪쳐 우물 속에 빠질 위험에 처했으나 역시 우물에 빠지지 않은 것은 도르래가 그녀를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도르레 위에 엎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우리는 그녀가 절름거리며 도르래에서 빠져나오다가 그녀가 얼음 만두와 얼음 젖꼭지를 밟고 두 발이 미끄러지며 엉덩방아를 찧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그녀 입에서 나오는 훌쩍훌쩍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설마 그녀가 울었을까?
그녀는 더듬더듬 기어 나와서 찬물을 한대야 받쳐 들더니, 두 여자의 몸에 뿌렸다.
그녀들은 놀라 소리치면서 번개같이 서로 떨어졌다.
그녀들 모두 서로의 머리칼을 잡아 뜯었고, 서로 얼굴을 할퀴었고, 서로 웃옷을 찢어서, 서로 상흔으로 얼룩덜룩하게 된 유방을 노출시키게 했다.
그녀들은 상대방의 피를 퉤퉤 뱉었고, 여한이 다 없어지지 않았다.
뚱뚱한 여인이 다시 물을 한 대야 퍼서, 힘껏 뿌렸다. 맑은 물이 공중에서 투명한 날개를 펼쳤다.
물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그녀는 다시 우물 둔덕에서 미끌어지며, 손에 들고 있던 법랑대야가 빙글빙글 돌며 날아갔다.
그것은 거의 배 나온 남자들의 머리를 찍을 뻔했다.
그들은 모두 우물가 여인들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놀리고 욕하고, 서로 이야기도 하고, 따지고 달래고, 그러다가 모두 판잣집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이 모두 장탄식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제야 모두가 우물 둔덕에서 일어난 코미디를 보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점심 무렵, 동남쪽 국도에서 마차 한대가 왔다.
말은 한필의 머리를 쳐든 큰 백마였는데, 두 귀 사이에 은색 갈기털이 아래로 내려뜨려져 이마를 덮고 있었다. 그놈은 부드러운 두 눈과 분홍색 콧날, 그리고 자홍색 입술 있었다. 그놈의 목 아래로 늘어진 빨간 헝겊 뭉치에는 구리 방울이 한 개 매달려 있었다.
그래서 그 말이 마차를 끌고 국도를 달려올 때, 맑은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차는 우리를 향해 흔들거리며 다가왔다.
나는 말 등에 높이 튀어나온 안장과 구리 판으로 씌운 번쩍이는 마차 끌채를 보았다. 마차 바퀴는 높았고 하얀색 바큇살이 박혀 있었다.
마차 덮개는 하얀 천으로 되어있었고, 하얀 전에는 빗물을 방지하는 오동기름을 몇 번이나 칠했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한 번도 이렇게 호화스러운 마차를 본 적이 없었고, 이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은 시보레 승용차를 타고 가오미 동북향에 새의 신을 참배하러 왔던 여인보다 훨씬 귀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마차 덮개 바깥에 앉은, 높은 예모를 쓰고 양쪽으로 뾰족하게 갈라진 팔자수염을 한 마부도 예사 사람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딱딱한 얼굴을 하고, 두 눈을 반짝였는데, 샤우에 량 보다 더 속을 알 수 없고, 쓰마쿠보다 더 엄숙을 떨어서, 어쩌면 냐오얼한이라도 그와 같이 품위 있는 옷을 입어야 겨우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차는 천천히 섰다. 그 모습이 아름다운 백마는 앞 발굽을 들고 땅을 두드렸는데, 마치 그의 목 아래에서 연주하던 방울 곡(曲)에 반주를 넣는 것 같았다.
마부가 마차의 커튼을 열자, 우리가 추측하느라 열중했던 인물이 곧바로 나왔다.
그녀가 나왔다.
그녀는 흑담비 코트를 걸치고, 목에는 붉은여우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우리 큰누나 상관라이디이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상관라이디가 아니었다.
이 사람은 코가 높고 파란 눈에 머리가 금발인 서양 여자였다.
나이는 그녀의 부모나 알까?
그녀를 따라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파란 학생 제복을 입었는데, 겉에 파란 모직 코트를 걸친, 머리가 온통 새까만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의 표정으로 보아, 서양여자의 아들 같았다.
하지만 그의 용모는 그 서양여자와 조금도 비슷한 구석이 없었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마치 그 서양여자를 약탈이라도 할 것처럼, 우르르 한꺼번에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녀 옆에 가기도 전에 쭈뼛쭈뼛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마님, 귀하신 마님. 내 손녀를 사세요."
"마님, 큰 마님, 내 아들 좀 보세요. 개보다 훨씬 튼튼하고 무슨 일이라도 잘해요"
.... 남자와 여자가 저마다 쭈뼛쭈뼛하며 서양여자를 향해 자기 아이를 마케팅했다.
오직 모친만이 조용히 원래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친의 시선은 멍하니 검은 담비 가죽 외투와 붉은여우목도리를 바라보았다.
물어볼 것도 없이, 그녀는 상관라이디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녀는 상관라이디의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마음속으로, 마차 바퀴가 굴러갔고, 그녀는 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고귀한 서양 여자는 손수건으로 입을 반쯤 가리고, 사람 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짙은 향내를 맡은 나와 쓰마집안 꼬마 놈은 바로 재채기를 했다.
그녀는 맹인 영감 옆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맹인 영감의 손녀를 저울질해 보았다.
맹인 영감의 손녀는 서양여자 목에 걸려있는 여우에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아이는 두 손으로 할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할아버지 뒤로 숨었다.
어린 여자아이의 겁먹은 두 눈동자는 내 머릿속에 뚜렷이 각인되었다.
맹인 영감은 코로 냄새를 맡고, 귀인이 옆에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손을 앞으로 뻗으며 말했다. "마님, 마님, 이 아이의 목숨을 구해주세요. 나하고 같이 있다간 얘도 굶어 죽어요. 마님, 나는 돈도 필요 없어요...."
서양 여자가 일어서더니 학생복을 입은 청년에게 몇 마디 '쏼라쏴라' 말하자 그 청년이 바로 큰 소리로 맹인 영감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 애 하고 어떤 관계요?"
맹인 영감이 말했다. "할아버지요. 아무 쓸데없는 할아버지, 죽어야 할 할아버지...."
청년이 다시 물었다. "애의 아빠 엄마는요?"
맹인 영감이 말했다. "굶어 죽었어요. 모두 굶어 죽었어요. 죽어야 할 놈은 안 죽고, 죽지 말아야 할 놈들이 먼저 죽었어요.
선생님, 제발 도와주세요. 얘를 데려가 주세오. 난 한 푼도 필요 없어요. 그저 아이를 살려주시기만 하면...."
청년은 뒤돌아 서서 서앙여자에게 쏼라쏼라 몇 마디 했다.
서양 여자가 고개를 끄떡 끄떡 하자, 청년은 바로 허리를 굽히고 여자아이를 잡아끌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의 손이 여자 아이의 어깨에 닿자 여자아이는 바로 그의 손목을 물어버렸다.
청년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펄쩍 뒤로 물러났다.
서양여자는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벌리고 눈썹을 치켜떴다.
그러면서 그녀가 입술을 가렸던 손수건으로 청년의 손목을 싸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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