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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필, 단편소설

물방울의 사랑: 나의 노신(鲁迅)문학원 꿈.(5); 赵凯

북경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모친이 갑자가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모친은 임종 전에, 마지막 힘을 다하여, 쉴 새 없이 미소를 지으며 나를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애썼다. 모친이 이미 말했던 한마디를 나는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살아서, 눈물 젖은 밥이라도 꼭 삼켜라."
모친의 젊었을 때 흑백 사진을 보면, 하느님은 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들의 병고로 시달렸지만, 이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 모친의 미모였다. 소녀 때, 모친은 대단한 문학소녀였다. 그 시절, 국민당 장교가 모친에게 홀딱 반했다. 이른 봄, 추운 밤에, 소녀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갓 녹은 유빙들이 서로 부딪혀 포효하는 강물에 뛰어들었고, 달빛 속을 달려가, 부친의 품 안에 안겼다.

나의 일상생활은 네째형과 넷째 형수가 보살펴주었다.
넷째 형수는 사방 십리 안 마을에서 제일 예쁜 처녀였는데, 21세에 우리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 그때 나는 12살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나서도, 넷째 형수는 시어머니를 도와 노인과 병자를 보실폈다. 네째 형수의 눈에는 내가 계속 어른이 되지 않은 아이로 보였나 보다. 어린 조카에게 맛있는 것을 사줄 때면 언제나 나에게도 조금 나누어 주었다.

마치 노인이 천신만고 끝에 큰 고기를 잡았을 때, 생각지도 않게 상어가 다가온 것이나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액운이 닥쳐와서, 나는 떨떠름하게 지옥에서 벗어났다. 비록 나를 위해 감옥 문이 열렸지만, 또다시 나에게 족쇄 쇠고랑이 채워졌다.
나는 심각한 신장병으로 생명이 위험해졌고, 지속적으로 40도가 넘는 고열이 나다가, 갑자기 차가워지더니 또 갑자기 뜨거워졌다. 심양에서 제일 좋은 중국 의과대학부속병원과 육군 병원 본원에서도 치로 할 수 없다고 하며, 북경에 가서 치료받으라고 권했다.
나는 스스로 온전히 거동할 수 없는 시골 장애인인데, 어디 가서 스스로의 치료를 결정할 수 있겠는가? 넷째 형수와 넷째형이 집안에 있는 양식을 팔고, 또 친구들에게 얼마간 돈을 빌려서 팔만元을 모아서, 조카에게 나를 옆에서 보살피며 북경에 가게 하였다.
어떤 작가가 나에게 말했다. "몸이 병든 것은 너의 불행이지만, 형수 잘 만난 것은 너의 행운이다"
나는 또다시 허약해져서 노신 문학관 부근으로 갔다. 수술대 위에서 마취되기 전에 나는 나는 병이 잘 치료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문학 꿈은 아직 바라는 목표에 이르지 못했고, 나는 또 노신문학원에서 공부해야 하니까.

2011년 여름, 심양 시정부의 배려로 , 나는 시 장애인 관련 통신 내부 간행물 편집인으로 임명되었다. 이제 나는, 내 힘으로 생활하게 되었고, 문화 사업에 종사하는 특수 농민공이 된 것이다.
그날 새벽, 날아갈 듯 기뻐하며, 시골 마을을 떠났다. 시골의 문화환경은 척박해서, 나는 도시의 문화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기를 갈망했다. 넷째 형수는 나 혼자 도시에 가는 것이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아 했다. 하지만 나는 결국 많은 스승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아직 일상생활을 완전히 혼자 할 수 없는 나였지만, 도시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2012년, 나는 시골집에 있을 때, 장편소설 < 마설(马说) >을 써서 중국 작가협회 주요 작품육성 부문에 입선하였다. 이 작품은 < 중국작가 >에 발표되었으며, < 중화 문학 선간 >에도 선발, 게재되었으며, 랴오닝성 조설근 장편소설 지명상을 탔다.
2014년, 심양시 신화 서점 빌딩에서, 나의 장편 기록문학 < 머슴살이 >의 신작 발표회가 열렸다. 동시에 나는 엄숙하고 간소한 결혼식도 거행하였다.
한 아름답고, 어질고 총명한 광동 객가족 여자가 나의 불구인 신체를 싫어하지 않고, 경제적인 조건도 좋지 않은데, 머나먼 곳에서 나에게 온 것이다. 심양 시에 나는 집도 없었고, 호텔에서 결혼식을 하자니 예식비용이 너무 비싸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서점에서 집처럼, 축하하러 온 친지, 선배들을 접대하기로 했다. 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중국과 세계를 통틀어 작가가 서점에서 결혼식을 했다는 기록은 없었으니, 나는 뜻밖에 새로운 기록을 만든 셈이다.
사실, 2014년 봄, 나는 랴오닝성작가협회에서 노신 문학관 진학 추천을 받았지만, 합격되지 못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나는 입학은 할 수 없었지만, 장가를 갔으니 그걸로 되었다.

2017년, 3년 후, 나는 노신 문학원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와이프는 나를 학원에 떠나보낼 행장을 꾸렸다.
내가 북경에 올 무렵, 심양 시는 여전히 겨울 모습이었다. 그러나 북경은, 거리에서 젊은 아가씨들이 바지 깃으로 아름다움을 서로 다투고 있었다.
노신 문학원에 들어가니, 새하얀 옥란화 나무가 봄바람 속에서, 밝은 햇살 아래 눈부셨다. 노신 문학원은 나무 하나하나 모두 꽃이 피어서, 마치 봄의 여신이 꽃꽂이 기술을 한껏 뽐내고 있는 것 같았다. 북경과 노신문학원은 이렇게 봄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객가인(客家人) : 이방인 이리는 뜻의 객가인은 원래 황하유역, 중원에 살던 한족 명문귀족의 후예로 난을 피해 복건성 광둥 성 등지로 남하하여 집단을 이루어 살았다.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 원형의 거대한 집을 짓고 수백 명이 한집에 살았는데, 현재 전 세계에 걸쳐 1억 명 정도가 있다고 한다. 동남아로도 남하하여 동남아 회교의 대부분이 객가인이라고 하며, 부지런하고 머리가 좋아 역사적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신해혁명의 손문, 중국 개혁 개방의 지도자 등소평, 싱가포르의 리콴유 총리, 모두 객가인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