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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필, 단편소설

청명절을 맞아 장인을 추모 함 (清明时节悼岳父) 罗元生 ; 1/2

북경의 봄은 추웠다 더웠다 하여, 종잡을 수가 없다. 초 봄이 되면,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게 무거 위지기 시작하고, 특히 청명절이 가까워지면 나는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닌데 육친이 그리워진다. 

20년 전, 바로 이 계절에 나의 부모 두 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는 장강(長江) 북안의 고향, 봄철이었고  마음을 찌르는 고통을 남겨 주었다.
지금은 북경에서, 오래도록 일하고, 살아오고 있다. 돌아보면, 여기서 나의 장인이 돌아간지도 만 7년이 되었다.

지난 일들이 바로 어제 같다. 청명 시절, 장인의 여러가지 일들이  눈앞에 떠오른다.

2008년, 구정, 긴 휴가가 지나고, 나는 회사 동료 두사람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해서, 장인을 집에서  301 병원 구급차에 실었다. 그때, 장인은 자기가 직접 만들어 20년 동안 사용했던 철 침대와 이별했는데, 그날은 봄날 오후였던 것으로 확실히 기억한다.
그날 장인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힘없이 눈물이 글썽한 시선으로, 이제는 떠나 갈, 집을 돌아보았다. 그의 마음은 대단히 차분해졌는지, 이제 가면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는 것 같다. 피골이 상접한 장인을 보며, 나는 마음이 쓰렸다.....

매우 빠르게도, 장인이 병원 침대에 누운지 한 달 만에, 그는 먹지도 못하고, 말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위암이 광범위하게 퍼져서 간에 까지 전이되었고, 이 때문에 대량의 복수가 찼다. 그가 저세상으로 간 날은 3월 3일 저녁 8시 13분, 향년 74세였다.

장인은 한가닥 가느다란 연기처럼 사라졌다. 한 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어떤 재물도 남기지 않았다. 남기고 간 것이라면, 그저 우리의 오랜 추억과  그의 인생에 대한 맛(品味) 같은 거였다.

장인은 딸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시작부터 그는 나를 자기 자식처럼 대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농촌에서 자랐고, 집안 형편이 가난해서 장인은 나에 대하여 지극히 자연스런 동질감을 가졌다.
그의 집안 촌수를 따지자면,  위로 형과 누나가 하나씩 있고, 부친은 일찍 돌아가셨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중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병사가 되었다. 그는 통신병이 되어 통신선로 시공을 담당했다.  그는 일 년 내내 야외에서 작업해야 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젊었지만 다리 관절에 문제가 생겼다. 그는 일상적으로 관절통을 달고 살았는데, 통증이 시작되면 억지로 이를 악물고 참았다. 아주 못 참을 지경이 되면, 부대 의무실에 가서 진통제를 받아먹고 통증을 참아냈다.
이렇게 되자, 막 삼십이 넘어서 양쪽 고관절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고, 나중에는 양쪽 엉치뻐가 괴사 하기 시작했다.
내가 301호 병원에서 일할 때, 그의 병원 기록을 보았는데, 그는 앞뒤 여섯차례 비교적 큰 수술을 받았다. 그중 네 차례는 정형외과 수술이었고, 이 네 차례 수술 중 세 차례가 고관절을 교환 수술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복부에는 더 이상 떼어다 부칠 피부도 없었다. 

1995년, 가을이 끝나가고 겨울이 시작될 즈음, 그의 전우의 아들인 린쯔(林子)라는 젊은이가 고향 안양(安阳)에서 북경에 왔다.  그는 집으로 돌아기기 전, 온 김에 그를 보러 왔고, 그때가 저녁 일곱 시도 넘은 시간이었다. 장인은 굳이 그를 지하철 역까지 배웅해 준다고 불편한 다리로 낡아빠진 자전거를 타고 린쯔를 지하철역 입구에 데려다주었다.
그런데, 돌아올 때는, 캄캄해졌고, 그는 그만 부주의로, 넘어뜨려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전에 고관절 교체한 조형물이 넘어질 때 그만 휘어졌다.
나는 그를 301호 병원에 보내면서, 화가 나서 질책했다.
"아버지, 어쩌자고 밤중에 자전거를 타고 배웅하러 갔어요? 그 애는 새카만 후배인데, 북경에도 자주 오지 않아요? 아버지 다리 아픈 생각은 안 하세요? 지금 린쯔는 벌써 집에 가 있을 텐데, 아버진 병원에 누위 있으니 도대제 이게 뭐예요!
장인은 통증을 참으며, 말없이 나를 주시했다....
병원에서는 신속히 수술을 진행했고, 수술은 여섯 시간이 넘게 걸렸다. 수술을 집도한 량위티엔(梁雨田) 주임이 말했다.
"이번 수술은 매우 복잡하고 많이 아픈 수술입니다. 차 선생은 늙었지만 워낙 강건해서, 계속 고통을 참았습니다."
수술 후 알게 된 것인데, 장인은 수술대 위에서 어찌나 아픈지 기절할 뻔했다고 한다.
퇴원하고, 회복된 지 오래지 않아, 장인은 양주임에게 주려고 한 폭의"인심 인술(仁心仁術)"라는 글을 써서, 나를 시켜 보내면서, 전문가에 대한 경의와 감사를 표시했다.

장인은 일생 동안 다리가 불편하였지만, 두 손만큼의 툭별히 솜씨가 뛰어났다. 그는 원래부터 고지식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으며, 또 소박하고 검소하여, 집에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은 거의 직접 만들어 썼다. 라디오, 녹음기, 자전거는 자기가 조립했고, 주방기구, 위생설비 같은 것은 모두 수리할 줄 알았다. 처의 말에 의하면, 그녀가 중학교 때, 물리 선생이 학생들에게 집에서 실험에 쓸 저울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장인이 하루 밤사이에 저울을 뚝딱 만들어 주어, 다음 날 가져갔더니, 선생이 한참 동안 꼼꼼히 이 저울을 들여다본 후, 말도 옷 하게 칭찬하며 학교에서 샘플로 쓰게 놓고 가라고 하였다. 처는 주기 아까워하며, 뻐기면서, 아버지가 바쁘게 하룻밤 사이에 만든 것으로....

 

장인은 마음이 따듯하고, 평소 말이 없는, 언제나 말을 하기보다, 실행하는 일이 더 많은 그런 사람이었다. 일찍이 1970년대에 그가 일하는 직장은 방산에 있었다. 이웃 고선생네는 아이가 많았고, 돈이 없다 보니 아이들 먹을게 부족하여, 장인이 적극적으로 따듯한 손을 내밀었다. 지금, 고씨 아저씨네 두 아이가 차 씨 아재가 그의 집에 도윰을 준 것을 잘 기억하고 있다.
공장에서는, 누가 곤란한 일이 생겨 휴가를 내면, 장인이 적극적으로 대신 일을 해 주었다. 한 번도 대가를 따지지 않으니, 젊은 사람들은 모두 그와 같이 일하고 싶어 했다. 같은 마당을 쓰는 이웃집 중, 누구네 집 등이 어둡거나, 세숫대야  밑이 구멍이 나서 물이 새거나 하면, 그를 찾기만 하면, 그는 제대로 고쳐놓기 전에는 쉬지도 않고 일했다.
고향을 떠나 왔을 때부터, 그는 군부대에서 일생을 일 했다. 졸병에서 군대 공장에 이르기까지 그는 나사못같이 성실했다. 8급, 기능공 차(車)씨란  그에게는 최고의 포상이었다.

 

 

☆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자기희생을 상징하는 모범병사 뇌봉(雷锋)의 정신을 본받자는 캠페인이 있었다. 雷锋정신 중 하나가 나사못 정신인데, 나사못처럼 누가 봐주지 않아도 묵묵히 자기 역할을 다하자는 뜻이며, 본문에서 나사못 같다는 말은 여기에서 파생된 표현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