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 불고 요동치던 나의 성장기를 회상하면, 내 마음은 잡초같이 무성하고 번잡했다. 나는 내가 얼음같이 차가운 괴로움 속에서 뼈에 사무치는 고생을 하면서 컸다고 생각한다.
양식이 먹기에, 충분치 않아, 식구들이 먹는 식사는, 슬픔 같은 것 때문에 사람이 목에 넘기지 못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옥수수 죽이 어찌나 멀건지 죽 위로 눈물 가득한 사람 그림자가 비칠 정도였다. 고구마는 썩고 변질되어 쓴 맛이 나는데도 그냥 쪄서 먹었고, 나는 먹고 나면 얼마 안 있어 위(胃)에서 난리가 나고, 토했다. 또 자주 토하다 보니, 토하고 난 다음 공복 상태에서 배가 고파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 이런 식사는 결국 생산대에서 옛날 어려웠을 때 먹었던 집단 식사보다도 훨씬 먹기 힘들었다.
어느 해, 큰 가믐이 들었을 때, 쓰촨 성 북부의 하늘은 비록 붉은 태양이 높이 비치었지만, 박성들의 생활은 끝없이 어두웠다. 양식이 감산된 것뿐만 아니라, 잎을 먹는 채소마저도 진딧물이 못쓰게 만들어, 석탄 덩어리 같아졌다. 위쪽에 붙은 벌레와 벌레의 분비물을 아무리 씻어도 씻을 수 없었다. 이런 채소나마 많지 않아서, 몇 개나 먹을 수 있을지 손가락으로 셈해가며 겨우 먹을 정도였다.
이때의 처참한 정도는 이야기 하나로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시원한 바람이 불고 따듯한 태양이 비추는 늦은 봄날, 정오에 우리는 막 근대과 밀기울을 넣은, 적당히 한 끼를 때울 죽을 끓이고 있었다. 그때 성(省) 밖에서 온 거지가 무거운 발걸음을 질질 끌며 점점 옅어지는 밥 짓는 연기가 나는 우리 집 문 앞을 지나다가, 엄마에게 밥을 달라고 하였다.
우리 집은, 겨우 생명이나 연장할 정도의 밥이나마, 한 사람이 한 공기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마음 착한 엄마는 역시 마음속에 자비심이 일어나서 모두의 그릇에서 조금씩 퍼서 거지에게 줄 한 공기를 그러모았다. 그 배가 고파 꼬르륵 소리를 내던 거지는 감격해서 공기를 받았다. 하지만 아름답고 선량 하다고 해서 밥 맛의 거칠고 이상한 맛이 바뀌지는 않는 법이다. 그는 두 모금 마시고 더 이상은 넘기지 못했다. 그는 눈물이 글썽해져서 엄마에게 말했다."누님, 정말 나 같은 거지 보다 더 어렵게 사시네요! 내기 여기서 2원을 구걸했는데, 이걸로 아이들에게 먹을 거나 사주세요."
어떤 사람은 성장한다는 것은 의복이 입을 수록 점점 작아지고 바지가 점점 짧아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꿈이 함께 점점 커지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내가 입은 윗도리와 바지는 원래부터 작고 짧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큰형이 입던 것을 둘째형이, 둘째형이 입던 것을 셋째형이 순서대로 물려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의복이 내 순서까지 넘어왔을 때는 형들이 입었던 저 고니와 바지는 거의 전부 여러 번 누덕누덕 기운, 팔이 드러나는 윗도리에, 다리가 드러나는 바지였다.
이런 이미 땀으로 층층이 얼 록지고, 세월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은 누더기를 여름에 입으면 시원하고 상쾌했지만, 한겨울이 되면 끔찍했다. 다 해져서 팔다리가 드러나는 윗도리와 바지는, 근본적으로 휙휙 들어오는 찬바람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한겨울이 되어, 몸에 맞는 두툼하고 실한 저고리와 바지가 없어서, 추위를 막아낼 수 없는 그것으로 이미 매우 심각한데, 한겨울에 신을 신발마저 없다보니 더욱 비참했다. 나는 어렸을 때 겨울에 거의 언제나 그냥 맨발로 돌아다녔다. 성장하던 시기에 눈 덮인 땅을 맨발로 딛으며, 조심조심, 비틀비틀한 발자국을 내고 다녔는데, 그것은 동시에 계속 불쌍하고 가슴 아픈 추억으로 남았다. 그뿐만 아니라 발바닥이 자주 얼음 조각에 찔려 피가 나기도 하고, 동상에 걸려 발이 커다란 빵 같이 부풀기도 했다. 제일 고통스러웠던 것은 발 뒤꿈치가 자주 얼어 터져서, 젓가락 같이 굵게 갈라져서, 수시로 피가 흘렀는데, 심지어 상처가 곪아서, 뼈가 보이는 지경까지 갔다....
세월은 꿈 같다 했지만, 내가 겪었던 그 계절은 의기소침하고, 황폐해서, 그 시간을 지내면서 꿈조차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버지가 조금만 능력이 있었다면, 혹은 시골의 다른 남자들처럼 아무 대책도 없이 가난할 때, 거친 바람이 부는 달 없는 캄캄한 밤, 집단 토지에 라도 나가서 고구마나 옥수수 같은 양식을 도둑질해 왔다면, 우리도 쫄쫄 굶는 불쌍한 처지에 이르지는 않았을 텐데!
혹은, 만약 아버지가 가을에, 산 꼭대기에 있는 억새나 야생 솜을 따서 가지고 오거나, 혹은 닭털이나 기러기 털을 주워다가 깨끗이 씻어 말려서 솜을 만들어, 그것으로 솜 옷과 솜바지를 만들어 주었으면 내가 겨울에 그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 텐데!
엄마의 안장 의식을 치른 날은 매우 날씨가 좋았다. 아버지는 두 무리의 징, 꽹과리, 대평소 패를 불러 이들에게 이 일을 처리하게 했다. 하지만, 이미 비통함이 골수에 까지 사무친 내 마음엔 결코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엄마의 장례를 이처럼 융중 하게 치르는 것은 , 자기가 엄마에게 잘해주었다는 증거를 친구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에 불과하거나, 혹은 그가 엄마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는데 대한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친척 친구들을 부지런히 접대하면서, 얼굴에 피로가 보이기는 했지만 결코 슬퍼 보이지도 않고, 무엇보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아버지를 보고, 나는 비할 수 없는 증오심을 느꼈다.
결국, 나는 아버지가 장례식을 거행하는 사람들에게 한차례 아낌없이 돈을 줄 때, 나는 그와 말다툼을 벌렸다. "이런 돈이 있었으면서, 왜 우리 엄마가 중병에 걸렸을 때 엄마에게 쓰지 않았어요?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어요? 아버지 마음에 우리 엄마한테 미안하니까 양심의 가책을 없애려고 그러는 것 아니에요?"
나는 아버지 친구들 면전에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벼락같은 소리에 진상을 모르고 아버지를 찬탄하던 사람들은 판이 뒤엎어졌고, 아버지가 전력을 다해 지키려던 체면은 산산이 깨졌다.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며, 무섭게 나를 때리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결국, 많은 아버지 친구들의 만류와 저지로 그러지 못했다.
억장이 무너진 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는 다시 기세를 몰아 그에게 맹세했다. 만약 그가 앞으로 후처를 얻으면 내가 커서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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