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 수필, 단편소설

성장 세월의 상흔 (원제.植满时间的疼痛) : 阵新-2/10

 

비록 시간의 바다에 잠긴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자랑스럽게 내 기억 속에 선명히  살아있는 게 있다. 중학교를 졸업한 그해, 나는 남충현 대통 구 관할, 대흥, 대통, 신묘, 용지, 영흥, 대관에 각각 하나씩 설립된 공사(公社) 중에서 유일하게 쓰촨 성 중점 중학(重点中學 - 영재들을 선발, 교육하는 학교)인 용문 중고등학교에 시험을 쳐서 선발되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처음 맞는 가문의 영광이었을 그 일이 우리 집에서는 겨우 며칠 빛나다가, 곤궁한 현실에 막혀 어둡게 사라져 버렸다.---- 용문 중학은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야 하는데, 기숙사에 가려면 매월 30元을 내야 했다. 경제, 문화 수준이 낮은 집안 형편 때문에 아버지는 그 학교에 나를 보내는 것을 단연코 거절했다.
비록 우리 중학교 담임이었던 양흥화 선생님이 내가 자격이 취소되어 등룡문의 기회를 잃는 컷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서 자기의 30원밖에 안 되는 월급 중, 매월 15원씩 도와주겠으니 나머지 15원은 아버지에게 대출을 해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서, 직장을 잡고 천천히 갚아도 된다고 했으나 아버지는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아쉽게도 집에서 아주 가까운 학교를 선택했다. 교육 수준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대통(大通) 중학에 진학한 것이다.

아버지의 독단과 단호함 때문에 내 소년시절 하늘같이 맑고 깨끗한 이상(理想)은 더 이상 밝아지지 않게 되었다.  알아야 할 것은 대통 중학은 남충현 교육 계통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2년제 농촌 고등학교였다. 당시 도시의 고등학교는 모두 3년제인데 비해, 대통중학교 같은 2년제 학교는 자기 스스로 2년 만에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하고, 3년제 고등학교를 나온 학생들과 함께 대학입시를 보게 되어있었다.  거기다, 두 학교 간의 면학 분위기와 교육의 질이 크게 차이가 나는데, 어찌 일반 학교 학생들과 경쟁하는 대학입시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사실상, 내가 대통중학의 교문에 발을 들여놓을 때, 내가 본래 기지고 있던 높고 크고 웅대하며, 햇볕이 두루 비치는 이상(理想)은 답답하고 기슴아프게 멀리 달아나 버렸다는 걸 분명히 알았다. 공부에는 뜻이 없고 오직 놀 궁리만 하는 농촌 학교에서 경쟁 대상이 없는 상황 아래, 나 홀로 출중하기는 했으나, 도시 고등학교의 성적 우수자와 게임을 한다는 억측은 애당초 말이 안 되었다.
나와 어떤 혈연관계도 없는 선생님마저 돈을 대어 나를 도와주겠다고 했건만, 나를 낳아준 아버지는 냉혈한이었다. 이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그 당시 나의 마음속은, 인생의 봄에 해당하는 시기였지만, 가득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구릉 같았다. 쓸모없는 가시덩굴만 무성했고, 평평하지도 않았으며, 겨울처럼 생기라고는 거의 없이, 쓸쓸하고 황량했다.

세월은 끊임없고, 원한도 끝이 없었다. 시간은 서로 같은 방식으로 그 때 그 때의 아픔을 전해주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하여 불타는 권한을 품었고, 심지어 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것도 아버지와 관계있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내 생애의 따듯함이었고 영혼 깊은 곳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녀는 쓰촨 성 낙산 은실의 집에서 태어났으며, 조상은 땅도 있고 공장도 있었다.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외조부는 가게와 재산을 팔아 돈을 마련하여, 비행기를 사서 전방의 항일 군대를 지원하기도 했다.
꽃송이 같은 우리 엄마는 도시에서 자랐고, 사천 재경대학을 졸업했는데, 중앙 TV 전 아나운서 루어징의 부모와 함께 대학 동창 중 퀸이었다고 한다. 그때 군의관을 제대한 아버지를 따라 고향에 와서, 남충현 대통 공사 농촌에 내려와 보통 농촌 아줌마가 되었고, 다섯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도시에서 룰루랄라 청춘과 사랑을 노래하던 엄마에게 시골의 연기와 먼지가 서서히 스며들었다. 남루한 옷과 배고픈 식사밖에 없는 현실은 차가운 서리처럼 그녀의 세계를 가득 덮었다. 한 송이 연약하고 선비의 기풍이 넘치던 그녀의 마음은 척박한 구릉지의 가난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부득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황량함을 받아들이도록 압박받았던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불어오는 바람은 어수선하게 동쪽에서 불다가 서쪽에서 불다가 했고, 엄마 가슴속에 품은 문인(文人) 풍의 숙원은 마음은 있으나 힘이 따르지 못하여, 결국 지키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제일 안타까운 것은 물과 토양이 다른 가운데, 노인을 부양하고 아이를 기르다 보니 엄마는 위(胃) 병을 얻었고, 이 때문에 위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녀는 더 이상 힘든 일을 할 수 없었고, 철두철미 집안일만 하는 가정부인이 되었다.

빈궁함은 칼처럼, 엄마의 건강을 손상시켰다. 서서히 그녀의 신체는 나빠져갔고, 집 뒤의 작은 길을 걸을 때도 지팡이를 짚어야만 갈 수 있게 되었다. 더욱 불행한 일은 치료할 돈이 없었다. 이 때문에, 그녀의 생명 시계는 끝내, 49세 되는 해에 멈춰 서 버렸다.

엄마의 짧은 일생은 생화처럼 시들어 떨어졌다. 나는 비통하여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강렬한 원망이 일어났다.
아버지의 무능이 가정의 빈궁과 모친의 요절을 불러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