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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필, 단편소설

긴 골(条子沟) - 1/3 贾平凹

 

진(鎭)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5리(1리는 500 m, 2.5km)를 가면, 바로 긴 골이 나온다. 골짜기의 길이는 30리(15km), 4개의 마을이 있다. 마을마다 모두 같은 성씨인데, 많으면 25~6 가구, 적으면 단지 3가구였다.

골짜기 입구에 돌 사자상이 하나 있는데, 머리가 몸통의 절반 크기이고, 눈은 머리의 절반, 갈기털은 얼룩덜룩해서 어디까지 갈기 털인지 분명치 않다. 돌 사자는 어수선한 풀밭에 벌렁 누워 있다가, 날이 가물면 사람들은 그걸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하면 신기하게도 바로 비가 내렸다.

시내 거리에서는, 오래 전부터 긴 골 사람들을 무시해왔다. 그 이유는 골짜기 안에 논도 없고, 면화도 심을 수 없으며, 그들은 369일 장에 나와, 장작을 져다 팔거나, 나무를 어깨에 지고 나와 팔았고, 시내 거리의 음식점에서 볶은 쌀(炒米: 기장을 소기름으로 볶은 몽고인의 일상 음식)을 한 사발씩 시 먹었다. 그곳 여인들은 물을 머리에 발라 광을 낸다음, 골짜기를 나올 때는 다 해진 옷 위에 새 옷을 걸치고 나왔다가, 골짜기에 다시 들어갈 때는 새 옷을 벗고 들어갔다. 하지만 온통 경사 지거나 움푹 들어간 골짜기 안에서도 몇 가지 감자는 심을 수 있었고, 몇 가지 옥수수는 재배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죽에는 삶은 감자가 떨어지지 않았고, 죽 한 사발 안에 감자 몇 개는 넣을 수 있었다. 거기다 온통 나무 천지니, 땔 나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고 집을 지을 때 석가래로 쓸 나무를 사려고 돈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거리에 사는 사람들 이라 해도, 원래 먹을 게 부족했고, 땔감은 더욱 부족했던 터라 오직 긴 골에 나무를 하러 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렸을 때, 처음 어른들을 따라 네닷새 요량으로 골짜기에 들어갔는데, 15리 까지는 언덕 줄기에 나무가 하나도 없는 완전 민둥산이었고, 나무뿌리까지 모조리 파내 가고 없었다. 나중에 십오 리 너머에 산림감시원이 생겼다. 그들은  팔뚝에 붉은 완장을 차고, 손에는 수갑과 목봉을 들고  다녔는데 하나하나 다 흉악해 보였다. 나무를 하려면 골짜기 깊은 속까지 들어가 굽이진 언덕을 뒤지고 다녀야 했고, 어떤 때는 인접한 다른 현(县) 숲까지 가기도 했다. 하지만, 골짜기 깊은 곳에 가서 산골짜기를 뒤지고 다니기는 너무 멀어서, 우리는 역시 골짜기 안에서 나무를 도둑질했다.
골짜기 사람들이 숲을 지킨다고 해야, 마을 밖의 숲까지 지킬 수는 없었고, 심지어 집과 집 사이의 나무조차 지킬 수 없었다. 늘상 말썽을 일으키는 골짜기 사람들은 나무해가는 사람들의 도끼와 나무짐를 빼앗고, 잡아서 가두기도 했으며, 팔다리를 때려서 다치게 하거나, 신발을 벗겨 그 신발을 언덕 아래로 던져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때렸던 사람이 장에 갔다가, 나무를 했던 사람에게 걸리면, 그대로 끌려가 구타당했다. 심하면 갈비대가 부러지고, 약하더라도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들은 이때부터는 다시는 감히 시내에 나가지 못 했다.

골짜기 사람들은 각종 방법을 생각해 시내 사람들을 저주했다. 홍칠과 석회를 이용해서 바위벼랑에 시내 사람을 그렸는데, 모두 사람 몸에 늑대 머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 십 년간 늑대를 본 적이 없다 보니, 늑대 머리를 그린 것이 개 머리  같았다.

그들은 공동 재산인 산림을 지켜내지 못했는데, 집과 집 사이의 자기 집에 속한 나무들만 바짝 지켰다. 골짜기 풍속은 사람이 하나 태어나면 나무를 한 구루 심었다. 소나무나 오동나무나 버드나무를 심었는데, 사람이 커가면 나무도 커갔다. 그러다가 사람이 죽으면 그 나무를 관재(棺材)로 썼다. 그래서, 그들은 나무를 보호했고 바로 나무에 부적을 붙이기도 했으며, 나무 아래 가시나무를 둘러놓기도 했다. 거기다 까마귀가 둥지를 틀게 하는 방법도 생각해냈고, 누구도 감히 이 나무를 베러 나무 가까이 오지 못했다. 나무를 베러 접근하면 까마귀가 바로 울어대서 그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집 사이에 있는 나무는 여전히 도끼질을 당했다.

나는 몇명의 사람들과 허씨네 집이 있는 마을에 나무를 하러 갔다.
허 씨 마을에는 집이 세채  있었는데, 두 집은 강변  위쪽에 있었고,  한 집은 언덕 바로 아래에 있었다. 우리는 모두 다섯 명이 갔다. 나와 일행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막내 삼촌이 문 앞에 가서 집주인에게 말하는 사이에 다른 세 사람은 바로 집 뒤로 가서 세 구루의 붉은 참죽나무를 베기로 했다. 막내 삼촌이  쌀 12근을 담은 자루를 들고 가서 온화한 어조로 옥수수와 바꿀 수 있느냐고 물었다. 집주인을 비쩍 마른 사람이었는데 솜이 비쭉 튀어나온 낡은 저고리를 입고, 허리에는 풀을 엮은 끈을 매고 있었다. 막내 삼촌은 쌀은 좋은 쌀이라 썩은 것 하나도 없다고 하며 쌀 한 근을 옥수수 두근과 바꾸자고 했다. 집주인은 옥수수도 좋은 옥수수라 삶아서 죽을 쑤면 되게 찰지니, 쌀 한근에 한근 4량의 옥수수로 바꿔 주겠다고 했다. 막내 삼촌은 한근 여섯량을 불렀다.집 주인은 한근 4량. 나는 막내 삼촌이 일부러 계속 말을 끊지 않고 하면서, 집 뒤로 나무를 베러 간 사람들에게 시간을 벌어주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나무를 베러 간 사람들이 절대 도끼를 쓰면 안 되는데 도끼를 쓰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렇게 했다간, 소리가 울리니 톱을 써야 한다. 톱을 쓸 때도, 톱질로 잘리는 부분에 오줌을 갈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마음이 조급해져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문 앞을 맴돌면서 집주인이 키우는 돼지가 살이 쪘나 안 쪘나 살펴보았다. 돼지우리 옆, 감나무의 약간  위쪽에 의외로 연시가 하나 달려있었다. 벌써 반은 없어져 버렸지만 감을 따서 내 입에 넣을 생각만 났다. 나는 나무에 기어오르려고 발을 나무에 걸쳤다. 집주인이 말했다. "올라가지 마라. 그건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거야. 벌써 반은 까치가 먹었지"라고 했다.
나는 맷돌 위에 앉았다. 골짜기 안의 집집마다  입구에는 돌 맷돌이 하나씩 있었다. 하지만, 허씨네 돌 맷돌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이건 돌릴 때 힘이 덜 들게 하거나 아니면 세월이 편안하게  지나 기기를 바라서가 아닐까? 추측했다.

세월이 편안할 수가 있나?!

흥정은 결국 결론이 났다. 쌀 한 근에 한근 반의 옥수수.
하지만, 집주인은 막내 삼촌이 입은 솜 저고리가 맘에 들었는지, 만약 솜 저고리를 자기에게 주면 30근의 옥수수를 줄 수 있다고 했다. 막내 삼촌의 솜 저고리는 원래는 까만색 무명으로 만든 거였지만, 오래 입다보니 퇴색하여 회색이 되었다. 막내 삼촌은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솜저고리를 벗어 그에게 주었다. 막내 삼촌이 걸친 거라곤 홑 적삼 밖에 안 남았다.

세 사람이 집 뒤에서 세 구루의 붉은 참죽나무를 넘어뜨리고 나서, 벌써 마을 앞, 강가 둔덕 절벽 아래 한구석에 메어다 놓은 다음 우리에게 알리려고 "호로록" 새소리를 내었다. 나와 막내 삼촌은 바로 옥수수자루를 메고 떠나려고 했다. 집주인이 "물을 안 먹겠냐?" 우리는 "안 먹는다". 주인이 "뻐꾸기가 우는데, 지금까지  어찌 뻐꾸기가 있을까?" 우리는 "오호라, 그건 멧비둘기 소리야."

5일이 지나서, 우리는 다시 골짜기에 나무를 하러 갔다. 오늘은 어디 가서 나무를 할까 모의하는데, 가는 길은 허씨네 마을에 접어들고 있었다. 전의 그 집주인은 더욱 수척해져서, 도끼를 들고 돌 위에 서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나무하러 골짜기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냅다 욕을 했다. 누가 그의 집 나무를 잘라갔다고 하면서. 그는 당연히 막내 삼촌을 의심했다. 삼촌과 함께 온 패거리들이 나무를 베어갔으니 바로 막내 삼촌을 찾아내겠다고 했다. 나는 겁을 먹고 모자를 끌어내려 얼굴을 가리고는 총총히 걸어갔다. 막내 삼촌은 이번에 오지 않았는데, 그는 홑저고리 차림으로 오는 바람에 단단히 감기에 걸렸고, 온돌방에 누워 5일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