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 수필, 단편소설

설은 완전하지 않다 (年不圓) : 晶达 - 끝

큰 이모 집 식구들은 모두 5명이다. 큰 이모 부부와 나의 사촌들(오빠와 동생들) 셋인데, 거기다 우리 모녀 둘이 더해져, 일곱 명이 년야반(年夜飯 : 섣달 그믐날 자저녁에 가족들이 모두 모여 먹는 야식)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매년 섣달 그믐날, 음력 12윌 30일만 되면, 엄마와 나는 언제나 설을 보내러고, 큰 이모네 집에 갔는데, 휑하니 넓은 거리에서 택시를  잡아 타고 갔다.
"설(年)"이란 개념은 나에게 있어서는 보다 "서둘러야  하는" 조급한 밥 한끼로 바뀌었다. 큰 이모네 그믐밤 야식은 어제나, 오후 세시 전후에 시작했다. 비록 엄마는 언제나 "조수 노릇하러 간다"라고 생각했지만 우리에게 세시 전에 그들 집에 먼저 가서 "폐를 끼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모든 가족들이 대개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떠들썩한 것을 꺼리다 보니, 일곱 사람이 설을 보내는데도 다른 사람 보기에는 당연히 조금 쓸쓸하게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때는 나도 결국, 이런 쓸쓸함을 즐기지 않았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렇게  습관이 된 것 아닌까 한다.

나와 엄마는 출발하기 전, 집안의 문에, 벽에, 유리창에 새로 정성을 다해 고른 대련과 복(福)자 종이를 연이어 붙였다. 그녀는 이전에는 언제나 습관처럼, 풀을 한 사발 정성껏 쑤었는데  그렇게 하니 의식(儀式)의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엄마는 풀을 신뢰했다. 많은 집에서 투명 테이프로 붙여놓으면  장난기 심한 아이들이 뜯어서 훼손시키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는 오직 풀만 믿었다. 엄마한테는 대련과 복(福) 자가 식구들이 함께 모이고 행운을 바라는 염원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풀도 중요했다.
나중에, 내가 집안에서 발언권을 갖게된 다음, 나는 결연히 풀을 양면테이프로 바꾸었다. 매년 새해마다 우리는 작년에 바른 풀을 제거하느라 매우 고생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집은 이미 대련을 뜯을 어린아이인 내가 다 자라서 우리 집 대련은 이제 무사 평안하게 되었다.
큰 이모는 엄마와 달리 그믐이 바로 앞이면, 대부분의 시간을 부엌에서 보냈는데, 보통 때보다 훨씬 오래 있었다. 그녀는 폭죽을 쏘든 안 쏘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들 집에는 이일을 아주 잘하고 좋아하는 사람---- 나의 사촌 오빠가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년야반을 먹기 전 집행하는,  "폭죽 의식"의 집행자 신분을 나의 어린 사촌오빠에게 빼앗겼다. 일반 폭죽뿐만 아니라, 사촌오빠는 얼티지아오 등 여러 가지 폭죽믈 쏘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의 폭죽에 대한 열정을 약화시킬 수는 없었다. 
우리 다우르족(전체 인구 13만의 몽골계 소수민족) 습속 중에는 설날 교자만두를 먹는 전통은 아예 없었다. 하지만, 한족에게 시집갔던 엄마가 이런 절차를 우리 집 설 명절에 들여왔고, 큰 이모도 이걸 모방했다. 그런데, 나는 큰 이모네 집에서  모방한 것은 그 실용성이 맘에 들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오후 세시에, 밥을 많이 먹더라도 자정까지 자지 않고 있으면 배가 고팠으니 말이다.

교자만두는 나와 엄마 두사람에 속한 것이다. 엄마는 통상 혼자서 주방에서 바삐 면과 소를 준비했고, 또한, 만두 속에 동전 두 개를  습관적으로 넣었다. 이 동전을 씹는 사람은 내년에  행운이 와서 돈을 많이 번다는 전설이 있다. 나는 언제나 만두를 빚으며 말하곤 했다. "엄마가 동전 두 개를 넣고 만두 빚는 건 쓸데없는 일이야. 우린 두식구인데, 한 명이 하나  씹기가 쉽지. 다른 집에서는 식구가 많아도 하나만 넣는데, 이러는 게 맞는 거야."
하지만, 우리 집에서 누가 동전을 씹든, 우리는 웃으며  다음 해 행운이 찾아오리라고 굳게 믿었다. 우리 집은 단 두 명이니, 어떤 행운이 찾아와 부자가 되든 다른  한 사람도 덩달아 똑같아진다는 의미가 아니던가?
바로 이 만두 한 끼가 엄마의 그믐밤 "폭죽 의식"을 보전해 주었다.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를  상에 올린 다음, 폭죽을 손에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96년, 나와 엄마는 이층 집으로 이사 갔기 때문에 폭죽을 쏘려면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했다) 나는 이층 베란다에서 그냥 구경만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내가 멀거니 내려다 보기만 한 것은 너무 엄마에게 쌀쌀맞았나는 생각이 든다.
*중국인들은 구정 명절 기간 내내 밤마다 폭죽을 쏜다.

내가 감히 상상도 못 했던 정경이 벌어졌다. 2012년 음력 설날, 엄마 혼자 큰 이모네 집에 년야반(年夜飯)을 먹으러 갔다. 한 사람은 TV로 구정프로를 보고, 한사람은  동전을 넣은 만두를 빚고, 먹고 했는데, 나는 그때 엄마 혼자 아래층에 내려가 폭죽을 쏘았는지는 알지 못한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폭죽 소리도 없이 그믐밤을 보냈을 테니 엄마 맘이 편안치 않았을 것이 염려되었다. 또, 다른 집의 폭죽 소리가 하늘에서 잇달아 펑펑 터지는 소리가 들릴 때, 엄마는 나를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전에는 매년 언제나 엄마와 함께 이런 폭죽 소리를 들어왔고, 매년 여장부 같은 엄마가 폭죽에 불을 붙이는 걸 보아 왔으니....

2013년 정월, 나와 엄마는 모두 북경에 있었다. 그믐날 밤, 나의 작은 셋집에는 대련도 없고, 폭죽도 없고, 동전을 넣은 교자만두도 없었다. 우리는 함께 TV, 구정 생방송 프로를 보고 나서, 내 고양이와 함께 잠이 들었다. 큰 이모가 연달아 며칠 동안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갑자기 연속 15년 모두 그믐 저녁 무렵이면, 시간 맞춰 큰 이모 집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그 시각에 그렇게나 멀리 이모에게서 떠나 있으니, 큰 이모는 마음속으로 쓸쓸하지는 않았더라도, 우리가 결코 친숙하지 않은 도시에서 낯선 설을 보내고 있지 않을까 걱정했을 것이다.
2013년 7월,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 그들 집에 인사하러 갔다. 사촌동생이 두 끼라도 밥을 먹고 가라고 했고, 한 번도 음식점에 가지 않았던 큰 이모까지 음식점에 왔다. 큰 이모는 외손자를 돌보느라 매우 피곤해했지만, 역시 나를 집으로 초대해 손수 음식을 차려 주셨다. 네 가지 음식, 생선, 갈비, 닭 볶음, 냉채를 차렸는데, 나는 먹다 먹다 느끼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꾸역꾸역 넘겼다. 나는 큰 이모가 영영 나를 못 보게 될지 모르니, 그리움과 사랑을 모두 이 몇 가지 요리에  농축시켰다는 것을 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기 오자 큰 이모와 사촌 동생이 모두 물었다. "설 쇠러 또 올 거지?" 그래서, 설은 기대로 변했다. 나는 그네들이 나에게 묻던 대충 그 시각에, 돌연 설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이 생겨났다. 새옷이든 폭죽이든, 대련이든 교자만두든, 모두 하나의 연결된 방식이고, 매번 친지 한사람과 함께 연결된다. 그것은 하나의 기대이며, 하나의 표면적 이름이며, 우리가 친지들이 말할 때 부끄러워하는 그 말 "나는 네생각 많이 해" 라고 할 때, 한마디 물어 볼 수 있는 말이다. "설쇠러 또 올거지?"

내가 태어나, 27세밖에 안 되었는데, 나는 벌써 여러 가지 형태의 설을 경험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 잊어버린 것은; 어떤 친지가 내 주변에서 멀리 떠나가고, 또 어떤 친지가 내 삶에 들어온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모이자(团圓)"라고  말하기 좋아한다. 하지만, 나에게, 처음 시작된 설에는 모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결코 과분하게 "완전함(圓)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도 있지만, 부족한(缺) 것도 있으니까.
비록 청뚜에서 한번 설을 보냈지만, 나는 그들이 설을 쇠는데 대한 견해를 받아들인다. ---- 구정  모임(团年), 한데 모인다(团圆)의 두 글자는 그저 모인다(团)로 충분하다.

설은 괴물이다. 그것의 개념은 나한테 있어서는, 새 옷과 폭죽에서 "삼총사"로 변했고, 또, 한 끼 밥으로 변했다가 지금은 하나의 기대로 변했다. 이 기대는 한정된 기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이 한데 모이는데 대한 기대이며,  결국 오랫동안 내 마음을 울렁이게 할 것이다.


原載  <傳承>2014년 제1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