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곱 살 되기 전, 아버지가 아직 있었을 때, 설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많이 기억나지 않는다. 더구나 다섯 살 전, 아직 외할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 설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더욱 기억하지 못한다. 엄마는 분명히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설을 같이 보냈고, 그것도 우리가 사는 마당 한구석에 앵두나무와 주리자 나무를 심은 단층집에서 설을 지냈다고 했다. 사람들은, 한족인 아버지가 우리의 생활과 융합되지 못함을 항상 느껴서 결국 멋대로 떠나버렸다고 했다. 내가 일곱 살이 되던 바로 그해에, 무책임하게 나와 엄마에게서 떠나 버린 것이다.
그래서, "설(年)"이란 말이 나오면, 나로서는, 모든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그중 하나의 구성 요소가 전혀 아니다.
어쩌면, 그가 떠나기 전의 7년에 이어 그가 떠난 후의 매번 설이 모조리 기억에서 지워져 버렸는지, 내 머리 속에는 심지어 단층집에서 그가 출현한 영상마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전에 우리와 함께 설을 보내는 상상의 그림조차 그려낼 방법이 없었다. 만약, 억지로 끌어다 댄다면, 그 그림은 기이한 느낌이 들 텐데, 바로 하나의 2차원 평면화에 3D 인물이 나타난 것과 같을 것이다. 외할아버지와 달리,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모두 단층집과 관련이 있다. 그는 바로 그 단층집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일부분이라, 나는 쉽사리 그를 우리 여자 셋이 설을 쇠는 정경에 마음대로 집어넣고 우리 네 사람이 함께 섣달그믐 밤, 야식을 함께 먹는 상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는 엄마, 막내 이모 그리고 나, 이렇게 세사람이 함께 설을 쇤 것이 설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다. 우리 세 사람 모두 목소리가 작고, 재잘재잘 끊임없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설 명절에 제일 많이 했던 것을 간단히 평하자면 ---- 어떤 때는 놀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나무라기도 하고, 어떤 때는 칭찬하기도 했다. 우리에게 매년 설날, 즐거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게 한 것은, 조려요, 조본산, 우군, 빙범 이런 코미디언들이었고 이들에게 감사한다. 어쩌면, 이들이 집안에 새로운 분위기를 불러왔기 때문에 엄마는 설 분위기에 빠질 수 있었다. 엄마는 폭죽 사는 것을 무척 좋아해서 장 바구니의 반 이상이 모두 폭죽이었다. 폭죽, "얼 티 지아오(二踢脚 : 두 번 소리가 나는 폭죽)"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간치기 애송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위험한 장난감"인데, 예식용 불꽃으로 매우 비쌌다.
설 명절은 한겨울이라, 우리집 마당의 과수나무는 모두 머리털이 다 빠져서 치료할 약도 없는 대머리가 되었다. 원래부터 짙은 흑색 토지는 겨울철에는 곧바로 설백(雪白)의 솜 저고리로 덮인다. 큰 마당은 시멘트로 된 작은 길로 반으로 나누어지고, 과수나무가 없는 쪽에 빨랫줄이 걸려있었다. 그 줄이 또 다른 임무를 받게 되는데, 바로 폭죽을 걸어 놓는 용도다.
엄마는 의식(儀式)을 대단히 좋아하는 낭만파, 정이 많은 여인이었다. 엄마는 미리 시간을 정해놓고, 음식을 모두 준비해놓은 다음, 나와 막내이모를 불러, 마당에 나오게 하고, 폭죽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대단히 용맹스런 여인이기도 해서, 요새 말로 하면 "여장부"였다. 게다가 이 총명한 "여장부"는 화약에 불을 붙이는 나무 끄트머리가 아주 짧아서 위험한데도 그녀는 매번 오렌지 향이 나는 나무 끝을 잡고 폭죽에 불을 붙여서, 의식을 한층 거창하고 격렬하게 보이게 했다. 나는 매번 한쪽 옆에 서서 두 손가락으로 힘껏 귀를 막고, 빨간색 폭죽 껍질이 하나하나 흰 눈 위에 흩어져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마치 설에게 작은 빨간 꽃을 한송이 한송이 그릇에 담아 나누어 주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중 한사람만 화약을 좋아하는 "삼총사"였는데, 같이 생활한 날자는 연속할 수는 없었지만, 아주 긴 시간이었다.
1995년, 그해는 나의 분수령이 되는 해였다. 집안에 자객(刺客)이 나타나 우리 "삼총사"의 이등변 삼각형 패턴을 완전 와해시켜버렸다. 그 자객이란, 바로 사랑 ---- 막내 이모가 먼 통랴오(通辽: 내몽고 자치주의 도시)로 시집을 간 것이다. 이렇게 큰 단층집에 나와 엄마 두 사람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래서, 두번째 형식의 설이 내 생활에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온 이십몇 년의 세월 중에서 십오 년에 걸친 빛과 어둠이었다.
나는 세 사람 있는 것과 두 사람 있는 것의 구분이 그렇게 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세 사람은 악단을 조직해서, GREEN DAY 혹은 Blank 182,라고 부를 수 있고, 사람들은 각기 악기를 무대에 올려 연주할 수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봉황전기 또는 무인양품, 무엇을 하든 악단의 반주가 있어야 그들의 재치를 뽐낼 수 있다. 여기서 우리 "삼총사"의 성원 한 사람이 "단독 비행"으로 날아가 버리자, 친애하는 큰 이모와 그녀 주위의 많은 식구들이 매번 설을 보낼 때마다 나와 엄마를 초청했다. 그들은 우리 둘이서는 더 이상 한곡의 완전한 노래를 부르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 것 같았다. 어느 때는 설날까지 기다리지 않고, 추석, 단오절이 시작될 때, 잔뜩 기다렸다다는 듯이 만나기도 했다.
나는 처음 큰이모 집에 가서 섣달그믐 밤 야식을 먹을 때의 정경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날은 막내 이모가 시집간 후, 처음 외지에서 설을 쇤 날이었다. 그녀는 새해 인사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그런 상황 아래에서 우리 민족 말로 어떻게 "곡(哭)"을 해야 하는지 배웠다. 곡하는 사람은 당연히 나였다. 엄마는, 왜 갑자기 막내 이모와 말을 하다가 말을 안 하고 있느냐고 내게 물으며 말했다."웨이라 야 베이" 이 말은 지금까지 뼈에 사무친다. 나는 당시 일종의 배신감과 버림 받았다는 느낌, 이 두가지 때문에 근심하고 슬퍼했다. 엄마가 말했다.
"너도 어느 날엔가 시집 가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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