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리둔(三里屯) 우체국. 한 프랑스 아가씨가 항공 속달로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 안에 정박(停泊)해있는 것은 어떤 소리들이었다. 그걸 납득할 때까지, 어떤 모양의 두 손이 기다렸다. 나는 우체국에서 일본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려고 준비하던 중이었다. 오직 시(詩)로 인해서 우리들은 함께 연결되었다. 일본 친구가 어떤 얼굴 표정을 하고 있는지 나는 전혀 모른다. 나는 그가 쓴 편지를 거리 한복판에서 읽었다. 삐뚤빼뚤한 한자로 쓴 원고 청탁 편지였다.
나는 내가 매우 넓은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사랑스런 우체국 때문에 내가 호흡하는 공간은 넓었다. 북경도 그렇게 작을 수 없다. 지구가 한 촌락이니까.
1999년 4월, 나는 북경 지안문(地安門:자금성의 후문) 거리 40호에 있는 통자루(筒子樓:복도 양옆에 방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의 좁은 방에 전혀 망설임 없이 월세로 들어갔다. 만족스러웠던 것은 건물 경비실에 우편수발실이 있었고, 많은 우편물들을 칠판에 써놓았다. 사람들은 신분증을 보여주고 우편물을 찾으면 되었다. 우편물 수발 책임자는 경비원 이안매(李安媒)였는데, 서(徐)씨라는 임시직에 비하면 그의 태도는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서 씨는 당직하는 날, 내 우편물을 따로 잘 보관해주었고, 송금 통지 등기우편물을 나 대신 일일이 서명하고 받아주었다.
당시, 나에게 경비실은 특별히 신경 써야 하는 곳이었고, 나는 매일 아침 9시에 우편물이 왔나 보러 갔다. 어떤 때는 거기서 많은 위로를 받았고, 어떤 때는 낙담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우정(邮政)에 대한 생각은 호북(湖北)에서 북경에 올 때까지 계속 이어져 왔다. 호북의 학교 교정에서 우편물을 기다릴 때는,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는 것 같았다. 담으로 둘러 쳐진 학교 안으로 우편이 통과하면, 외부세계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경에 와서, 나는 원고료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어떻게 하면 북경에서도 계속 작품을 써갈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래서 그 곳에 대해 주의력을 집중시켰고, 이안매와 서 씨의 신상에도 주의력을 집중시켰다.
경비원은 내가 계속 중시하는 사람들 이었다. 그들이 바로 우정(邮政)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이다. Q시의 교정, 담장 안에 살았던 몇 해동안, 경비원들과의 관계가 제일 친밀하였다. 편지들은 모두 그들이 직접 나에게 갖다 주었다. 그들은 대부분 고향에서 돌아오라고 하는 사람들 혹은 길거나 짧거나 간에 얼마 후에는 떠날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친구로 지냈는데, 그들은 내 의사에 따라, 내 편지를 따로 모아, 경비실 한구 퉁이에 놓아두었다가 내가 직접 받아가게 했다. 손 씨라는 경비원은 내 편지를 그의 침대, 베개 아래 두었다가 그의 따스한 체온이 남아있는 편지를 내 손에 넘겨주기도 했다. 경비원들과 처음, 한번 좋은 관계를 맺으니 편지를 잃어버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전에, 어떤 여자 근무자가 우편물 분배, 전달하는 일을 상당히 태만히 하여 편지가 사무실 여기저기 떨어져 있던 일도 있었는데, 그때 나는 속으로 그녀가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경비원 손 노인은 지금까지도 그의 모습이 기억난다. 나의 면전으로 배달 편지를 내밀던 그의 쭈글쭈글한 손등을.
내가 여행을 떠나면, 그는 편지들을 종이 상자에 잘 넣어두었다. 그런 성실한 태도로 나에게 편지를 넘겨줄 때, 그의 표정은 나에게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게 했다.
그런데, 거기에 있던 사람들 중, 내가 작품을 쓰디보니, 매일 그렇게 많은 편지가 오고, 외지와 은밀히 교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그들은 나를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권세와는 상관없이 생활하는, 별 볼 일 없는 친구라고 여겼다.
북경에 와서 문학잡지사의 편집인이 되었다. 곽향매라는 여자 내부 편집책임자가 매일, 우편물을 검은색 커다란 사무 책상 위에 가지런히 쌓아놓았다. 나와 동료들은 쥐 죽은 듯 소리 없이 편지들을 하나씩 뜯어서 원고를 읽어보고, 심사를 하고, 원고에 대한 심사평을 써서 각각의 작가들에게 회신했다. 이것이 일상 업무가 되었다. 나는 남방에 있을 때, 교정 큰 사무실에서처럼, 몰래 시와 문학류의 저작 초고를 읽을 필요가 없었다. 편집부에서는, 때로는 내가 여러 해 전 Q시에 있을 때 편집부로 부친 원고를 뜯어 여는 기분을 느꼈다. 여러 해에 걸친 흔들림을 통해서, 현재 내 수중까지 온, 그것들을 나는 조심조심 뜯었다. 그건 내가 좋아하는 손작업이었다.
나는 내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무명의 작가에서 편집인이 되었으며, 작은 도시에서 수도까지 온 것이다. 나는 매주 후통(湖同: 자금성 근처 옛날 골목, 골목 투어 명소)의 그 느릅나무 옆을 지나갔다.
나는 편집부 외벽의 녹색 담쟁이넝쿨을 넘겨다 보면서, 사무실 책상에 쌓인, 새로운 우편물들을 생각했다. 나는 그것들이 보고 싶어 조바심했고, 종이 위의 소리를 경청했다. 나는 내가 바라던 일을 하면서, 편집에 대하여 모종의 경외감을 가지고 있다. 내가 바로 한 명의 작성자였기 때문이다. 손으로 쓴 한통의 원고를 읽을 때, 여러 해 전, 내가 꿈을 안고 책상에 엎드려, 먼 곳을 향해 저작 초고를 써서 투고하던 정경이 떠올랐고, 그건 따라지 생명의 글쓰기였다.
나는 편집장이 몇몇 원고들을 폐기 처리해 버리자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어떡하든 그 원고들을 보존하고 싶었다. 나는 결국 한통 한통 편지로 회신하기로 했다. 우정(邮政)을 통해서, 각지의 이름 없는, 편지 쓴 사람들과 연계가 이루어졌다.
책상 위의 편지들은 점점 줄어간다. 이메일은 또 얼마나 빠른가? 시대의 변화는 놀랍다. 직장을 제공한 문학잡지사는 끊임없이 사무실을 바꾸었다. 그만큼, 시장에서의 생존이 힘들어졌고, 눈앞에 시대의 각종 압박이 밀려들어왔다. 나 역시 무력하게 책상위의 편지들에 관심을 보이며, 자주 전국 각지로 출장을 다닌다. 점점 편지에 대한 관심이 떨어져 가고, 우정에 대한 느낌도 점점 얕아져 간다. 조용히 거의 사라져 가는 나의 시선, 나는 점점 더 그것들과 멀어져 간다.
그런데 우체국 친구, 왕향청이 우연히 명절날 위문품을 보냈다. 그는 언제나 나를 염려해서, 일부러 나에게 그의 존재와 그와의 지난 일을 떠올리게 한 것 같다. 그는 여전히 호북 지방 우체국에서, 옛날과 똑같은 일을 한다. 이 옛 진구는 나를 우체국과 친근하게 만들었고, 우체국을 이해시켜주었다. 그는 믿음직스럽고, 시간이 지나도 결코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헤어진 지 꽤 오래되었고, 그렇게 먼 시공(時空)을 떨어져 있지만, 그는 여전히 거기 그대로 있고, 나에게 우정(邮政)의 안부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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