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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필, 단편소설

유배자의 하늘(流放者的天空) 鹏鸣 (五) - 4/4 끝

 

1820년, 송균은 서송이 증보, 개편한 28만 자(字)의 <서수 총통 사략>을 조정에 보냈다. 이 당시, 황제는 이미 가경의 아들인 도광(道光)이었다. 도광은 이 책을 본 후, 기쁨에 넘쳤다. 그는 이 책에 이름을 하사하여 <흠정  신강 지략>이라 했고, 직접 서문까지 썼으며, 무영전(武英殿)에 넘겨 간행토록 했다.

서송이 신강 이리에서 고생살이한 세월도 벌써 봄 가을이 열 번 지나갔고, 마침내, 도광은 그를 사면했다.

이리로 유배 온 지방장관, 문인, 묵객은 매우 많다. 서송은 비록 명성이 높았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는 큰 공헌을 함으로써, 역사책에 당당히 이름을 남겼다. 서송 같은 급의 관료와 문인들이 유배자 중,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으나, 이리는 서송에게  직접 몸으로 경험한 경세 학파 지리학자의 지위를 성취하게 해 주었고, 여러 학자들이 운집한 학계에서 숭앙받는 스승이 되게 하었다.

학자 양겸(杨鐮)이 말하기를 '청대(淸代)는 신강(新疆) 유배를 통하여 국책을 시행하였고, 충실히 요새를 방어했다'라고 하였다. 건륭 2~30 년간부터 1911년까지 신강은 중국의 시베리아였다. 만약 유배 생애가 없었다면, 기효람(纪晓岚)은  "물고기의 먹이(魚蟲)" 학의 학자로 가라앉았을지 모르며, 기운사( 祁韵士), 서송(徐松)도 늙어서도 부지런히 공부하는 사람 정도로 치부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적  의의는, 그들이 서역 역사 지리 학파 중 제일 처음 서재를 벗어나 직접 몸으로 부딪힌 지리학자였다는데 있다.
유배가 있었으므로 해서 홍양길, 임측서, 등정 정, 양인환 등 인물들도 실패한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우국충정으로 충만한 시인(詩人)인 것이다.

유배는 문인과 그의 가정으로 말한다면, 너무나 큰 불행이요 재난이지만, 그들의 유배지인 ----  이리로서는 큰 다행이고, 혹자들은 천만다행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유배자는 수리(水利) 공사를 일으키고, 선진 농업기술을 전파하거나, 혹은 책을 저술하여 학설을 세웠고, 당지인 자제들을 교육했다. 한마디로 문명의 씨를 퍼뜨려, 수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준 것이다.

이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유배를 찬미하면 안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 까닭은 유배가 인간 본성에 대한 괴롭힘이고, 문명에 대한 손상이기 대문이다.

나는 이리하(伊犁河) 대교에 서서 밤낮 끊임없이 세차게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묵묵히 수백 년 전 타향에 와서 늙어 죽은 영혼들을 추모한다. 이 시각, 나 역시 외지를 방랑하며, 처자식을 그리워하는 이방인인 것이다!

※흠정(欽定) : 황제의 명으로 제정하다.



原載 <문예보> 2017년 1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