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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필, 단편소설

유배자의 하늘(流放者的天空) 鹏鸣 (五) - 3/4

서송은 당시,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 시험에서 판에 박힌 문장을 반대하는 태도를 견지했고, 부임 초기부터 여러 가지 조치를 시행함으로 고시의 폐단을 개혁하고자 시도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그가 떠벌인 개성(個性)은 당지 관료와 토호들의 미움을 샀다. 어떤 이는 기회를 빌어 가경황제에게 서송의 구대(九大) 죄상을 나열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중에는 "교자를 탄 채 영성문(고대 한족의 중요한 문묘)을 들어갔다", "사서 제목에서 경문을 찢었다"라는 두 가지 죄상도 들어 있었다.

이번에는 서송이 제대로 큰 사고를 친 것이다!

조사가  이리저리 진행되었고, 구대 죄상의 대부분은 허위로 드러났지만, "성현을 우습게 보았다"와 "시험제목에 경문을 찢어서 냈다"는 두 가지 죄명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서송은 학정(學政)으로서 다른 사람의 모범, 솔선수범이 되지 못했으며, 가경은 이일로 진노했다. 그는 서송을 엄히 징계하라는 교지를 내렸고, 서송은 강등되어 이리로 유배 가는 중벌을 받았다.

서송은 하급관리에 의해 압송되어, 반년이 넘게 걸어갔고, 결국 의기소침하여 혜원성에 도착했다. 오는 동안, 그는 시문(詩文)  하나도 남기지 않았고, 황제의 뜻에 반하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신강에 도착하자 오직 규칙대로 하급직 임명을 기다았는데, 언행이 무척 신중했다. 오직 살신의 화를 당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시 한 줄지어서 읊지도 않았으며, 마치 걸어 다니는 시체처럼 살았다.

서송은 혜원성 남선문 부근의 집을 배정받았다.
그는 혐의를 벗기 위해, 성실하게 자신을 개조할 결심을 했다는 표시를 했고, 자신의 거처에 "부용암"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리장군 송균이 한 동안 서송을 관찰했는데, 이 젊은이는 침묵 속에 살며, 말이 적고 움직임이 신중하고 조용하나 가슴속에는 비단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그런 장점을 살 리려면 당연히 선발해 써야 했기에, 그에게 책방의 모 하급 문관 자리를 주려고 하였다. 송균은 그의 생각을 조정에 상주했는데 가경이 이를 보고 몹시 불쾌해하였다. "시혜를 베풀 생각이면, 이건 잘못된 상소이다"  라고 하면서, 송균에게 "유배자에 대하며 아음이 여리게 대하면 결국 법을 제대로 집행할 수 없다. 너는 언제나 관용을 베풀려고 드니 그 무슨 심보냐?" 라고 꾸짖었다. 

송균은 가경의 큰 꾸지람을 듣고, 너무 놀라서 벌벌 떨었다. 그렇다고 기가 죽은 서송을 그대로 볼 수도 없어, 자기 권한 범위 내에서 그를 기용하여, 지방 역사를 편찬하는 일을 맡겼다. 서송은 자기의 처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고, 삼년이나 오년이 지나면 자신의 원적지로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를 접었다. 잘못하면 이곳 이리하(伊犁河) 지역에서 여생을 보내고 늙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벼슬 길은 이미 희망이 없어졌으니, 남은 길은 역사서를 수정 편찬하는 일뿐. 그는 심혈을 기울여 서북지방의 역사 지리를 연구하였고, 후대 사람을 위하여 가치있는 저술을 남겼다.

송균은 서송에게 먼저 <서수총통사략>의 증보 수정 일을 맡겼고, 더불어 그에게 창조적으로 일을 할 수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고 1815년에서 1816년 사이에 천산남북로를 고찰하는 일을 하게 했다.

서송은 자기를 인정해주는 송균장군의 은혜에 화답하여,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천산남북을 넘나들며, 강풍과 눈보라를 무릅쓰고, 거의 만리 길의 여정, 초원, 설산, 흐르는 물길, 파오(몽골인의 텐트), 사막을 두루 돌아다녔다.
원래 <서수총통사략> 12권의 기초는 증보 편찬하자 28만자에 달했다. 이 증보 편찬으로 체계가 보다 완비되었고, 내용이  훨씬 풍부해졌으며, 무엇보다 서술이 더욱 정확해졌다.

동시에 서송은 수집된 자료를 근거로, 계속해서 3부의 서역 역사 지리 저작의 초고를 썼다. 그는 이와 더불어 <한서 (동한의 반고가 지은 역사서)> 서역전에 나오는 고대 지명의 연혁을 고증하였고, <한서 서역전 주석> 2권을 썼다.

서송은 실지 조사와 아울러 광범위한 문헌 조사를 읽었으며, 이를 기초로, 1819년 저명한 지리학 전문서적 <서역수도(水道)기>를 썼는데, 전서 총 5권이며 거기에 수도 지도를 첨부해 놓았다. <서역수도기>는 서송이 이리에 유배된 기간에 제일 심혈을 기울인 책으로 학술 가치가 제일 높은 저작이다. 예로부터 역사 지리학계의 추앙을 받고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신강, 이리 역사 지리 연구의 중요 참고 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