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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필, 단편소설

유배자의 하늘(流放者的天空) 鹏鸣 (五) - 2/4

중국 바이두에서 퍼 온 이리 관광용 풍경 사진

기운사가 카스(喀什) 하곡에 있는 수렵장에 도착했을 때, 찬탄을 금치 못했고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 시구를 남겼다.

무술 연마와 국경이 겹쳐지는 사냥터,
힘차게 날아가는 각궁 소리에 깃발이 번쩍이네.
삼천명이 하는 조련은 구름 비단 같고,
먼 낭산(狼山)에 사냥 갔던 군사들이 돌아오네.

당조(唐朝) 때, 이미 이리 서부 지역에 몽지(濛池) 도호부를 설치했었기 때문에 기운사는 그의 유배 시집을 <몽지행고(濛池行稿)>라고 이름 지었다.

기운사가  이리장군 송균(松筠)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고,
이리  사람들에게도 송균이 집정했다는 것은 지역의 행복이었다.

이리장군 송균은 일개 무부(武夫)였지만, 그는 문인 학자들을 유달리 존중했다. 그는 청렴하고, 솔직 담백했으며, 빈민들에게 여러가지 시혜를 베풀어,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변방을 다스린 공적이 탁월했다. 송균은 신강 지역 문화를 대단히 중시했고, 적극적으로 신강 역사서의 편찬을 지원했다.

그는 기운사를 보살피기 위해, 그를 "인방(청 8기의 하부조직)의 장경(章京)"으로 임명 배치했다. 이 업무는 비교적 쉬워서, 기운사는 관련된  자료를 열독하고, 사적지를 방문하고, 고찰하는데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쏫을 수 있었다. 그는 이리의 산과 호수를 직접 다녀보고, 다른 민족의 정서와 풍속을 몸으로 직접 느꼈으며, 일련의 서북지방의 역사, 지리 저작을 편찬 저술하였다.

몇 년간의 서북지방 유배 생활 중, 기운사는 전심전력하여 서역의 역사, 지리를 연구하였고, <서수총통사략> 12권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건륭, 강희 시기의 신강 연구, 특히 이리지역의 역사, 지리, 정치, 경제를 다룬 중요한 지리서이다. 이와 동시에 그는 <서수요약>  4권과 <서역택지> 1권을 완성하였다. 이밖에 서수 죽장사(칠언절귀 시)100수를 지어, 신강 16성(城)의 새, 짐승, 곤충, 물고기와 초, 목, 과일, 채소와 복식, 음식의 쓰임새와 변방 부락 등을 시로 읊었다.

기운사는 저술 뿐만아니라 교육에도 힘 썼다. 혜원성에 있는 기간에는, 심혈을 기울여, 적지않은 젊은이 들에게 지식을 전수해 주었는데, 그중에는 만주족, 몽고족 등 소수민족 청년들도 포함된다.

3년 후, 기운사는 유배 기한이 끝나 내지로 돌아갔는데, 그는 란저우(兰州)의 난산서원과 바오딩(保定)의 연지서원에서 피땀을 흘려, 계속 젊은이들을 배양하였고, 우리나라 역사 지리학계의 한시대의 대가가 되었다.

송균(이리장군)은 인재를 사랑하고 아꼈다. 그는 이리에 유배 온 사람들을 자주 인방(印房)에서 몇 년씩 일하게 하며, 그들을 좋게 평하고, 그들이 회개하여 기꺼이 힘써 일하고, 업적을 세웠다고, 황제에게 주청 했다. 그 결과 그중 대다수가 사면 받을 수 있었다.

기운사를 보낸 지 5년 후, 이리는 젊고 장래성이 있는 저명한 학자 서송(徐松)을 맞게 되었다. 그는 30세가 되던 해, 호남 학정(湖南學政)에 임명되었는데, 이 자리는 전 성(省)의 교육과 과거시험을 담당하는 정삼품 고위 관직이었다.
서송은 소년의 꿈을 이루어, 단숨에 고위직에 올랐다. 이 때문에 관가에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를 질투하는데 혈안이 되었고, 이를 갈았다. 그들은 드러내 놓고, 또는 안 보이는 데서 그물을 쳐놓고, 그에게 약점이 될만한 자료를 수집해서 불시의 필요에 대비해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