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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필, 단편소설

중국지도 측백나무(中国版图柏) : 梁衡 - 4/5

은천에 있는 서하 왕릉
우루무치 박물관 ( 땅에 귀를 대고 말발굽 소리을 듣는 병사)
서하 유물

일반인들은 기껏 양자강 남쪽 물의 고향, 동정호 호반, 어부들의 뱃노래 가운데 저녁 무렵 악양루 정도를 알고 있다. 그런데 어찌 저 요새 밖 고한령을 일찍이 생각해 내었을까? 그건 아마 범, 구, 등 세 사람의 우정과 일단의 역사적 증거 때문일  것이다. 악양루는 벽돌과 나무로 지은 인공적인 건축물이고  경력 개혁의 동지들의 남방 좌표이다. 그리고, 고한령 위의 지도즉백나무는 그들의 북방 좌표이다. 더욱 진귀한 것은 그것이 살아있는 생명이며, 하나의 살아있는 좌표라는 것이다.
악양루는 하나의 문물인 반면, 지도즉백나무는 한그루의 고목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문자, 문물이지만, 이에 더해서 고목나무로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수목(樹木)은 가장 충실하고 말이 없다. 그러면서도 살아있어서, 푸른 가지와 녹색 잎이 있고, 즙도 니오고 액체도 나온다. 그러니, 고목나무는 정감 있는 기록인 것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지도측백 나무는,  수령이 971년이나 되었다. 당지인의 말에 따르면  범중엄, 구양수가 이곳에 왔을 때 그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한 확실한 고증은 없지만, 이 나무는  범, 구 양인이 산과 준령을 넘어 빙설을 헤치고, 요새를 지어 성을 지켰다는 것을 분명히 증명한다.  또한 경력신정 개혁파들의 나라 걱정, 백성 걱정,  애국, 보국 사상의 증거이기도 하다. 현재, 사람들은 고한령 위에 "범구정(范歐亭)"을 지어 그들의 공적을 기념하고 있다.
이상하게, 내가 세차례 고한령에 올랐을 때는 모두 깊은 가을 무렵이었다. 매번 고한령에 오를 때마다, 산과 계곡이 솟아오르고 꺼진 것이 확연히 보이고, 모든 나무들이 조용하고 쓸쓸한 때였다. 그래서, 바로 구양수의 <추성부(秋声赋)>가 생각났다. "가을 풍경은, 그 색이 어둡고 쓸쓸하다. 가을에는 연기와 구름이 모여들지만, 가을은 얼굴이 맑고 깨끗하며, 하늘은 높고 해는 반 짝인다. 가을의 색은 맑은 밤색이며, 차가운 공기는 돌 침을 살과 뼈에 놓는 것같이 시리다. 가을의 생각은 외롭고  쓸쓸하며, 산천(山川)은 적막하다."
범, 구 는 역사의 하늘에 안개가 자욱하고, 구름이 뫃였다가, 하늘이 높아지고 청명해지자 점점 드러난 큰 인물이다. 이 지도 측백나무도 천년의 풍우를 혼신의 힘을 다해 견뎌왔다. 나무는 여러 겹의 주름을 깊게 새기면서 여러 산들을 내려다보며 우뚝 솟아 음직이지 않았다. 
송(宋)과 하(夏)가 전쟁을 벌일 당시에, 이 나무는 이곳에 꼿꼿이 서서  국경의 경계목이 되었다. 지금, 일천 번 봄이 오고 가을이 갔어도 , 나무는 여전히 외롭고 쓸쓸한 고한령 위에 서서 북쪽 경계선을 지켜보고, 또 역사를 지켜보고 있다.

고한령 연역의 두번째 출처는 중국판도경극으로 청조 강희제 때 나왔다. 원래 명청 시절, 지금의 신강성 이리하(伊犁河) 일대에서 흥기한 준가얼 몽고족의 한 지파가 있었는데 강희제 시절, 그 수령인 가얼단의 영도 아래, '중앙아시아의 맹주'라고 불리었다. 그 세력은 동쪽 흥안령에서, 서쪽 이리까지 세력을 뻗쳤으며, 수시로 남하하며 성들을 침범하고 지역을 약탈했으며, 백성들을 잡아갔다. 그는 대청 북쪽 하늘의 일대 먹구름이 되었고, 강희제 마음속에 하나의 돌덩이처럼 무거운 압력을 주었다. 경부가 없어지지 않는 한, 노나라의 난리는 끝나지 않는다는 말처럼, 가얼단이 없어지지 않는 한, 대청의 난리는 끝나지 않을 거고, 이외의 북부 변경의 판도를 마무리할 방법은 없었다. 강희는 반격을 결심했고, 세 번에 걸쳐 직접 친정(親征)에 나섰다.

일차는 강희 29년(1690년), 가얼단이 흥안령 서쪽 언덕에서 남하하며, 바로 북경을 압박했을 때였다. 37세인 강희는 고북구에서 출병하여 지금의 허베이, 내몽고 경계인 바이 삿 초원에서 가얼단 군과 마주쳤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우란포통 전투이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서 확실히 지키리라는 보장이 없었던, 가얼단은 기인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로 군사들에게 일만 두의 낙타를 다리를 묶어 땅에 앉혀, 초원 한가운데를 빙 둘러싸게 해서 마치 성처럼 만들게 했다.  낙타들은 저마다 등위에 농짝을 걸쳐놓고 축축한 담요를 덮어놓았다. 군사들은 그걸 바리케이드 삼아 화기를 발사하고, 활을 쏘았으니 이름하여"낙타 성 진형"이라 하였다. 이것은 아마, 중국 외의 전쟁사에서 낙타를 전투 바리케이드로 이용한 유일한 사례일 것이다. 청군은 화포로 이 성을 공격하였다. 불쌍한 것은 죄 없는 낙타들 뿐이었다.

나는 가을철 초원에 관한 글을 쓰려고 이 지방에 간 적이 있었다. 초지 위에는 많은 작은 호수들이 있었는데 푸른 하늘, 흰구름이 물 위에 비치고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해 호수들은 모두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강희제의 외삼촌도 장수로 참여하여, 직접 낙타 성에 올라 격전을 치루다 희생되었고, 근처 호수는 나중에 장군 연못으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상상이 간다.
전쟁은 청군의 대승이었다. 가얼단 군은 패퇴하자 지금 몽고 국 서부, 커푸두어로 도망쳤다. 1695년, 가얼단은 다시 3만의 기병을 이끌고 남침해왔다. 이듬해, 강희는 다시 군사를 이끌고, 두스코우(지금의 허베이, 적정)에서 제 이차 친정을 시작했다. 그는 가얼단을 계속 추격하여 지금의 외몽고 울란바토르 동남쪽까지 추격하였다. 가얼단 군은 계속 패퇴했는데, 군사들이 얼마나 많이 전사했는지, 그는 겨우 수십 기만 데리고 도망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