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 36년(1697년), 강희는 다시 군사들을 독려하여 제3차 친정에 나섰다. 거얼단을 마지막으로 깨끗이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출발전 유시를 내려 산서, 섬서, 감숙 3성을 순무했는데, 일제의 비용을 중앙에서 발부토록 하였다. 이런 기회라도 지방에 비용을 부담시켜 백성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다. 강희는 2월 29일, 부곡의 유가에서 황하를 건넜고, 3월 14일, 고한령에서 일박했다. 둘째 날에는 일찍 잠이 깨었는데, 삭풍에 뼈까지 시렸고, 한기에 으슬으슬 떨렸다. 그는 산정에 올라, 늙은 즉백나무를 손으로 부둥켜 잡고, 북쪽을 멀리 바라보았다. 뭇 산들이 솟고 가라앉은 앉았는 가운데, 온 세상이 백설로 하얗게 덮인 끝없는 벌판이 펼쳐졌다. 강희는 저도 모르게 전방의 군사들이 고향 집을 떠나 얼음과 눈에 덮인 변경을 지키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마음속에 한바탕 감동이 밀려들어, 바로 시 한 수를 지었는데 <차가운 새벽, 병사들을 생각한다>라는 시다.
"긴 강은 얼어붙었고, 삭풍은 휘몰아치는데, 갑옷을 입고 창을 들고 섰느라 쉬지도 못하네. 매번 서리 꽃과 새벽 달만 보니, 불쌍한 병사들은 추위를 이기지 못하네."
장려한 산하, 강대한 군용은 말에 오른 천자를 격려했고, 강한 오랑캐를 멸사시키지 못한다면 결코 장부의 뜻을 꺽지 않으리라 맹서 했다. 이때, 공교롭게, 이리에 있는 적의 소굴에서 내란이 발생했다. 강희는 세늘 타서, 군사를 이끌고 서진했는데, 단숨에 적을 섬멸하기 위함이었다.
3월 14일, 거얼단이 전투 중 사망했고, 청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4월 7일, 승리하고 회군한 강희는 기쁨에 넘쳐 다시 시 한 수를 지었다. "황제의 어가에 사방에서 예물을 바치고, 바다 건너 모두 신하를 칭하는구나. 사막 북쪽 땅을 말하지 마라. 모두 여섯 해를 그치지 않고 근심했으나, 세 번 친정(親征)에 나서 변방을 평정하니, 내 비로소 마음이 편안하도다. 보루에서 연기와 먼지가 사라졌으니...."
그는 부하에게 말하기를, 짐이 두 해 동안세번 사막을 갔는데, 바람으로 머리를 빗고, 비로 머리를 감았다. 고생이 어찌나 심한지 이틀에 하루치밖에 못 먹고 다녔을 정도였는데, 이게 다 강국을 세우려는 대업을 위해서였다.
우리가 강희의 세번에 걸친 북쪽 지방 친정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와 전후한 8년간, 현재의 중국의 판도는 기본적으로 그가 그때 다져놓은 것이다.
강희는 수차례에 걸친 친정으로 반란을 평정한 것을 제외하고, 두가지 큰 일을 해결한 것으로 조사, 연구되었다.
그 하나는, 장성을 보수하지 않은 것이다.
1691년 5월, 강희가 가얼단에 대한 1차 원정이 있은 후, 고북구(古北口) 총병관 채원은 조정에, 그가 관할하는 지역의 장성이 기울어지고 훼손된 곳이 많으니 보수 공사를 시행해 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강희는 동의하지 않았고, 지시 공문을 내려 단호하게 말했다. "진나라가 장성을 축조한 이래, 한(漢). 당(唐), 송(宋)이 계속 수리해왔으나, 그때라고 어찌 변경에 대한 걱정이 없었겠느냐? 명조 말, 우리 태조께서 대병을 통솔하여 파죽지세로 장성을 들이치니, 도로는 와해되고, 아무도 당하지 못하였다. 여기서 나라를 지키는 길은 오직 민심을 얻는 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심을 기쁘게 하면 나라의 기본을 얻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변경은 저절로 튼튼해진다. 소위 "중지 성성(众志成城많은 사람이 뜻을 합하면 성(城)을 이룬다)"이라고 하지 않는가? "
강희는 한명의 만주족 황제지만, 유가의 경전에 능통하였고, 역사를 통찰하고 있었기에 이른바 "나라를 지키는 길은 오직 민심을 얻는 데 있다. "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 민심 위에 장성을 축조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얻기 힘든 귀한 생각이다. 이것은 청조가 나라를 세워 260여 년이나 유지할 수 있었던 원인 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강희의 "민심 장성"은 많은 항목을 함유하고 있다. 한족의 선진 문화를 흡수하였다는 점과 다민족이 같이 살 수 있게 했다는 점, 과거제도를 적극 이용했으며, 한족 관리의 등용, <강희자전(康熙字典)>의 정리,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 등이다.
☆참고: 중국에서 가장 역사가 긴 왕조는 明 265년, 이어서 淸 260 년이고, 다른 왕조들을 기껏 100년 정도에 불과 하다.
두 번째 큰 일은 금지(禁地)를 개방하여, 몽고족, 한족이 융합하게 한 일이다. 원래, 청 왕조의 개국 초기, 몽고족, 한족 양민족의 갈등을 피하게 하기 위해진(晋), 섬(陝), 몽(蒙)의 변경에 장성을 따라 50리(2.5km)의 넓은 선을 긋고 일천 리 길이의 완충지대, 황금지(皇禁地)를 만들었다. 그 땅에서는 몽고 민족은 방목을 하지 못했고, 한족은 농사를 짓지 못했다. 이번에 그는 고한령을 지나면서 변경지역의 몽고, 한족 양민족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한 것을 보고, 바로 영을 내려 금지를 개방하는 한걸음을 내디뎠다. 강희 35년(1696년) 그는 영을 내렸다."구역을 넘어 농사짓기를 원하는 백성에게 선을 넘어 농사짓는 것을 허가 한나, 단, 싸우면 안 된다." 다음 해, 산서, 섬서의 한족들은 연이어 얼싸안고 준거얼 기(旗) 개간 토치로 몰려들어 갔다. 이것이 바로 나중에 연연히 수백 년간 이어진 주서구(走西口)의 유래이다. 처음에는 변경민들이 봄에 들어가서 가을에 나오는 것만 허락했고, 거주하지는 못하게 했으나, 점차 발전되어 구 내외에서 거주 생활할 수 있게 했다. 청(淸) 정부는 누차에 걸쳐 관련 정책을 조정했으며, 끊임없이 측량을 하고 나무랄 데 없이 관리했다. 나중에 고한령 일선에 "인, 의, 예, 지, 신 다섯 글자로 이름 지은, 다섯 개발토지의 주인을 위한 성채를 설치했다. 인, 의 두 단은 서하 곡 관리에 속했고, 예, 지, 신 삼단은 섬서 부곡의 관리에 속했다. 이것은 변경 지역의 경제를 번영시킨 것 외에도 문화 면에서 민족의 대융합을 실현시켰고, 나중에 올, 다민족 국가 발전의 기초를 다진 것이다.
현재, 나는 손으로 비취빛 측백나무를 쓰다듬으며, 멀리 강과 산을 내다보고있다. 여기서 아직도 잔존하고 있는 술루며, 봉화대가 보인다. 하지만 변경선은 북쪽 천리 밖으로 옮겨졌다. 산 아래, 물과 풀이 우거졌는 데, 소와 양 떼가 보이고, 몽고족의 장조가 하늘 끝으로 날려 흩어진다. 황하 양안에 연결된 논 밭길, 벼와 기장의 온 들판, 농부의 집에서 밥 짓는 연기가 하늘하늘 올라온다.
당시의 옛 전장터는 이미 평화롭고 화합하는 땅으로 바뀌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이 일대에서 일하도록 배치받았다. 이곳은 농업과 목축업이 교차하는 지역이고, 몽고족, 한족이 섞여있는 지역이다. 나는 격세지감이 느껴지며, 저도 모르게, 강희의 말이 떠오른다.
"민심을 즐겁게 하는 것이 나라의 근본을 얻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변경은 저절로 튼튼해질 것이다."
현재 고한령은 이미 여유구와 삼림공원으로 개발되어 경제와 관광 가치를 갖춘 고한 목단(古寒牡丹)이 되었다. 천산 만곡의 송백의 짙푸름 말고도, 오색찬란한 모란이 온 들판에 펼쳐진 경관이 많이 있다.
측백나무 엎에는 새로운 강희 동상이 섰다. 석양이 그에게 비칠 때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범구정에 칠해놓은 한층 금빛의 윤곽도 석양에 반짝인다. 이때, 다시 고개를 들어 비취빛 측백나무를 보면 그건 국경에 서있는 경계목이 아니다. 그건 새로운 공간의 지표이다.
요새에 가을이 오니 풍경이 아름답다. 해질 무렵, 긴 연기가 역사를 말해주는구나. 높은 산등성이, 봉화대 아래, 비취빛 측백나무가 푸르다.
原載 2016.2.3. 人民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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