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중엄은 당시 지금의 연안에서 간쑤 성 일대에 이르는 서쪽 국경선에서 군사를 이끌고 작전을 펼쳤다. 송 인종은 경력(송대 연호) 4년 범중엄을 하동, 섬서 선무관에 임명하고, 황금 백 량을 하사했으며, 그에게 지금의 산시 성에서 산시 성 신목, 부곡 일대에 가서 동쪽 전선을 시찰토록 했다. 원래 당시의 송(宋)의 하(夏), 요(辽)에 대항하는 대본영은 하동에 있었고, 그곳은 지금의 산시 성에 있다. 고한령 동쪽의 인주 요새는 황하 서편 고립된 지역에 있으며, 매년 하동에서 양곡 60만 석, 건초 120만 수레를 공급받아야 해서 송으로서는 부담이 컸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 어떤 사람은 인주를 지키는 것을 포기하자고 주장했다. 황제는 범중엄에게 직접 가서 현지 조사를 해서 생각을 보고하라고 했다. 범중엄은 인주를 힘써 지키자고 주장하였고, 황제가 그에게 상으로 내린 황금 전부를 변경을 지키는 장졸들에게 나누어 주며 모두가 국가를 보위하자고 격려했다. 그는 또 유민 3천 호를 보살피는 보수 공사를 실시하고, 부역과 서금을 면제해 줌으로 변경지역 경제를 회복시켰다. 이 해에, 조정안에서 다시 간관(諫官) 구양수를 전선으로 파견 조사하도록 했다. 파견, 조사 후 그는 범중엄의 시행 방법을 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인주는 천험의 요새라 포기하면 안 됩니다. 인주를 포기하면 부주(현재 부곡현)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황하 동쪽의 주, 현들이 모두 불안해집니다." 그러면서, 지금 산시 성 북부에 있는 저, 대, 거풍 등지를 개방하여, 경작을 하게 함으로써 변경을 실하게 하고, 웅후한 주변 지역경제력을 진일보시켜, 가까운 데서 전선에 직접 보급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건의했다. 구양수는 또한 현지인(그는 이들을 토호라 불렀다)을 장령으로 등용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상소문에서 말했다. "금일 인주를 의논하는데, 계속 유지하자고 하면, 하동에서 곤경에 빠질 것이며, 포기하자고 하면, 황하 밖의 땅을 잃을 것입니다. 만약 양쪽 전부 보전하고, 하나도 잃지 않으려면, 토호를 선발하여, 인주의 천험을 이용, 굳건히 수호토록 하게 함이 낫고, 병 2천이면 충분히 지킬 수 있습니다. ----- 그들은 스스로 집같이 여기고, 조용히 연결되어, 전장에서 용맹을 떨치고, 스스로 굳건히 지킬 것입니다.
전통극 <여태군이 장군 선발을 신청하다>에서 여씨는 바로 송나라 때, 이곳에서 대대로 변경을 지키던 토호 집안을 말한다.
조정은 그를 매우 신임하여 가장 높은 관직인 일품을 주었다. 여씨는 사실, 성이 저(折)씨였으며, 당지에서는 이 두 글자가 동음이었다. 작년에 송 역사 전문가가 부곡에서 저 씨를 전문 주제로 한 연구 토론회를 열었다.
범,구 두시람의 고한령 시찰은 경력 4년에 있었다. 이 해에 대해서 말하자면, 사람들은 중학교 교과서에서 읽었던 <악양루기>를 떠올리는데, 시작되는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경력 4년, 봄, 등자경은 파릉군으로 좌천되었다" 범, 구, 등 세 사람은 가까운 친구였고 모두 당시의 개혁파와 주전파에 속했다. 범중엄과 등자경은 역시 진사에 같은 해에 붙었고, 같이 현재의 장쑤 성 남통에 파견되어 바다를 다스리고 제방 쌓는 일을 했다. 바람은 거세고, 파도가 높아, 당시 많은 사람들이 퇴청을 알리는 북소리만 기다렸다. 그러나 범, 등 두 사람은 거센 파도에도 우뚝 솟은 산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고, 절친한 친구로 더욱 가까워졌다.
그 후, 운명은 또다시 그들을 동남(東南) 연안에서 서북지역 황량한 사막으로 내몰았다. 범중엄은 칭양(庆阳) 전선에서 군대를 지휘하여 작전을 했고, 등자경은 당지의 지방관으로 임명되어 적극적으로 전선을 지원하고, 보급 업무를 확실히 실행하여, 두 사람의 우정은 더욱 깊어졌다. 이때, 조정에서 이들을 시기하던 보수파가 기회를 잡아, 등이 군대를 위로한답시고 돈을 펑펑 쓴다고 무고(誣告)하며 그를 잡아다가 문초하고 감옥에 넣어야 한다고 했다. 범중엄이 황제의 면전에서 이치를 따져가며 강럭하게 항의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하면, 전선의 장졸들이 낙담하게 될 텐데, 이후로 누가 황제를 위해 변방을 지키겠습니까? " 등은 가까스로 면죄를 받았으나, 파릉군으로 죄천되었다. 그는 임지에 도착해서 전혀 기죽지 않았으며, 마음을 다하여 지역을 다스렸고 이년 후에는 방치되었던 사업을 다시 재개하여 정말 악양루를 중건하였다. 이때, 그는 두 명의 목숨까지 내던질 친구가 떠올랐다. 바로 범중엄과 구양수였는데, 이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 속에 그들이 각각 한편씩의 악양루기(岳阳楼记)를 써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것은 사실 건물을 빙자하여 자신들의 뜻을 밝히고, 그 웅장함을 기록으로 남겨달라는 뜻이었다. 등은 <구기신(求记信)>에서 이렇게 말했다. "천하 제국들이 뛰어난 산수(山水)를 가지고 있으나 각각 환경이 다르니 누가 더 낫다고 할 수 없다. 산수에 누각이 없으면 올라가 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누각에 문자가 없다면 오래되지 않았다 할 것이다. 또 문자가 웅재거경(雄才巨卿:위대한 인물의 뛰어난 재능) 하지 못하다면 이것은 저술이라 할 수 없다." 그의 눈에는 오직 범, 등 두 사람의 재능만 "웅재거경"으로 보였다. 이 편지는 현재 <악양 현지>에 남아있다. 하지만 역사에 어찌하여 구양수의 글은 남아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게다가 범중엄의 <악양루기>는 천고에 남을 명문이 되지 않는가? 범의 이 글은 '취옹의 마음은 술에 있지 않다.(酔翁之意不在酒)'처럼, '동정호의 파도는 가슴속에 쌓인 분노에 물을 끼얺어 주는구나'라고 그들의 개혁 경력과 인생의 정취를 은유해 쓴 글이다. 그것은 그의 "경럭신정(庆励新政)" 바로 정치개혁의 문학적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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