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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필, 단편소설

우쩐(乌镇)의 물에 비친 그림자 (乌镇的倒影) : 张抗抗 - 2/4

그곳은 미술관 같지 않고 오히려 문학관 같아 보였다. 철학과 사상이란 원래 문학과 예술 속에 살아있지 않던가?
목심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문학 친필 원고를 수천 매 남겼는데, 개관전 때 50여 매 전시해 놓았다. 그밖에 그는 생전에 십여 가지 소설집과 수필집, 시집을 출판했는데 하나하나마다 정교한 금속 혹은 목제 전시 함안에 전시해 놓아 문물의 기상을 보여 주었다. 1930년대 초기, 순진무구한 글방 청년이 친척인 심안영 선생 집에서 서양문학의 명저들을 두루 섭렵, 독파하고, 태호(太湖) 바깥에 끝없는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쩐을 열십자로 관통하는 물길에 있는 동서남북 울타리들을 이 문학청년이 일제히 수문을 열어 젖힌 것이다.
작은 배가 천천히 여유롭게 대운하를 돌아, 그를 훨씬 큰 부두로 데려 가 신식 교육을 받게 한 것이다. 역사상 부유하고 인구도 많았던 우쩐은 동서남북에 특이하게 사면에 수문을 설치해 놓았는데, 태호의 해적들이 재물을  약탈하러 올까봐 지키기 위한 것이다. 물속, 물 위로 견고한 철책을 세워놓았는데, 선각자의 예언 가운데 일찍부터 숨어 있었던 것이다. 철책은 우쩐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해적 걱정이 사라지자  큰 채난이 닥쳐왔다. 그것은 또한 목심의 숙명이기도 했다. 1971년부터 1972년 사이 문화 대혁명 기간에 상해에서 18개월 동안 밝은 세상이 감옥에 갇히는 재난이 있었고, 그것은 대체로 그가 불신하고 불경했던 본래의 신(神)때문이었다. 폐기된 방공호 수감시설에서 그는 "죄수로 갇혀 있을 때의 일기"를 썼는데, 지하의 검은 물을 이용해서 썼고, 누리끼리한 "자백서"를 쓰거나  혹은 재료의 페이지상 66편, 65만 자의 글자로 썼다. 세상과 동떨어진 잠고대 소리와 미친 소리는 차곡차곡 조심해 접어서 옷소매 가생이에 넣고 꿰매서 남길 수 있었다.
사상은 어두운 그림자에서 만들어진다. 다행히 지금까지 남은 친필 원고는 오랜 세월을 경과하느라 습기와 얼룩이 번져있다. 생활이든, 인물이든, 감각이든 모든 것은 세월에 의해 한 구절 한 구절 희석되고 녹아없어진다. 마치 물결이 잔잔한 가운데 물에 비친 그림자같이, 잉크가 번진 흔적만 남는 것과 같다. 전시관 안에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 확대되어 작은 만년필 글씨들이 빽빽하여 빈틈이 없었고, 마치 질식할 것 같은 시대를 보여주는 것 같다. 페이지에는 비록 모든 글자가 빼어나고 보기 좋지만, 이미 한  글자도 충분히 분별 할 수 없었다. 목심 선생은 과거에 대해 거의 담론 하지 않았다. 또한 고난에 대해 다시 말하지도 않았다. 죽음같이 고요한 감옥에서 그는 자신이 서방 선지자와 대화하는 것을 상상했으며, 한 자 한 자  써내려 갔다. 여러 해가 지난 다음, 그는 농담 삼아 말했다.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모두 나와 같이 지하감옥에 갇혔지!"
그 붕괴되어 사라진 시대에서는 그저 문자나 절학만을 이용하여 자유로운 영혼을 지킬 수 있었다. 암흑의 긴 밤은 그를 전혀 다른 것에서 지켜주었으며, 오직 예술만이 운명적인 행운 또는 불행이었다. 벽 사이에는 간혹 그의 간결한 한마디가 끼어 있었는데  모두 대단히 멋진 말이었다.

제일 마음에 드는 넓은 공간은 미술관 내의 계단식 도서관인데, 전세계의 예술 대가들이 숙연한 얼굴로 같은 시간에 강연했던 곳이다. 당시 사람들로 시끌벅적 했었으나 곧 조용해지고 아무 소리도 없었다. 계단은 아래에서 위를 향하면 올려다본다는 뜻이고, 위에서 아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은 내려다본다는  뜻이다. 목심은 자기가 깊이 존경하는 선배에 대하여 마주 보는 시선으로 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마주 본다는 것은 올려다보거나 내려다보는 시선의  중간점이다. 도서관의 홀은 이렇게 높고 넓었는데 옆에 차곡차곡 넓게 쌓인 책들은 손을 뻗으면, 닿기도 하고 또 안 닿기도 했다. 이것이 혹시 천당(天堂)의 모양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