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문학이라는 자양분 속에서 회화(绘画)가 자라났다는 말인가? 혹은, 회화의 채묵(彩墨)이 흑백의 단조로운 문자에 알록달록한 색을 입혔단 말인가?
나는 말한다. 목심의 문자는 회화의 물에 비친 그림자이며, 목심의 회화는 문학의 물에 비친 그림자이다.
물에 비친 그림자는 기껏 물 위에 나타날 뿐이다. 우연히, 또 하나의 거울이 된 것이다. 물에 비친 그림자는 물의 경지에 속할 뿐이다. 고향 우쩐의 물은 조용하고, 부드럽고, 평온하며 느릿느릿하다. 천년 도시의 여덟 갈래에서 오는 물----- 흑수의 물은 책을 만들게 했고, 수묵의 물은 그림을 그리게 했다. 목심의 시문(詩文), 회화 연구의 결정을 보면 물속에 녹아있고, 시원시원하고 날렵한 함의가 있다.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는 것처럼 강인하게 한 점 한 점, 한 획 한 획, 스며들고 관통하고, 배를 띄우고 배를 뒤집고.... 이전 세기말의 고향에 돌아와 보니, 고향은 쇠퇴하고 녹슬고 희망을 잃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우쩐 항의 부드럽고 푸른 물을 응시하며, 그는 개탄하는 마음을 바꾸었다.
이것이 바로 나의 문풍(文風: 글의 풍격)이다.
21세기가 되자, 물의 도시 우쩐에서 멀리 바라보는 시야를 가진 쩐썅홍(阵向宏)이란 인물이 나왔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우연히 목심에 대해 연구하게되었고, 신선을 본 것처럼 크게 놀랐다고 한다. 우쩐 역사상 양조명 태자에서 시작된 이래 천여 년이 지나도록 지속된 문제가 선생의 문맥(글발)으로, 갑자기 물길이 가로 세로 놓이고, 파도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안목이 있고 박력 있는 기인(奇人) 쩐썅홍은 결국 여러 곳을 전전하다 쩐 단칭( 阵丹青)을 찾아냈고, 이후의 모든 일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하나의 거의 실현 불가능에 가까웠던 문화 이상향이 오늘, 소설같이 우쩐에 태어난 것이다.
목심 선생은 결국 반신반의하며 소망한 대로 그를 있게 한 수원지로 돌아왔다. 우쩐의 철책은 영원히 다시 수문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나오는 스크린에 한 온화하고 진실한 노인이 있다. 천천히 서두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무언가를 말한다. 고국을 떠난 지 이십여 년, 여전히 저장성 사투리가 입에 붙었으며, 편안한 미소 가운데 보기 드물게 청년시절의 상쾌한 기질과 풍모가 드러나 보인다. 그는 구시대 최후의 신사이며 신세기 늦게 바다 건너 돌아 왔다. 중국과 서양, 어제와 오늘이 불가사의하게 그의 신상에 집중되었으며, 그것들이 서로 어우러져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쩐 단칭은 이렇게 평가했다. 목심은 아마도 고전 한문 전통과 "54" 문화 전통을 이어주는 유일한 작가이다. 그는 반세기의 문학" 공백"을 채워주고.... 나는 뉴욕에서 목심을 발견한 후 바로 이 사람으로 인하여 문화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심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더 이상 목심처럼 말하는 사람은 없어졌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사람들이 질의하는 방식으로 연연히 이어졌다.
우리는 관용적인 언어 시스템으로, 여전히 책과 작품에 글자의 행간을 남기고 있다. 우리는 이미 혈액 안에 일 세대의 사고방식을 완고하게 좌우하게 하는 잘못된 직관을 뿌리 내리게 하고, 침투하게 했다.
오히려, 이런 시대 저런 시대에 고독하고 차가운 눈으로 신변과 맞닿은 지대에서 살아간 노인이 있었다. 그는 시대 주류의 어감과 문체를 벗어나 버릇같이 된 논조를 사용하기 거부하고, 침묵하며 자기의 미학 세계에 살았다. 나는 어둠 속에서 큰 눈(雪)을 흩뿌리는 사람이다. 당신이 다시 안 온다면, 나는 곧 눈을 내리게 할 것이다.
목심 선생의 작품 가치를 다르게 표현하면, 일종의 독특하고 우아한 심미 취미, 그리고 분위기와 인격이다. 만약 당시 유행하던 상스럽고 천박함을 잘 안다면 비로소 목심의 정묘 하고 소탈함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는 자주 니졔의 말을 인용했다.
자신이 처한 이시대를 극복하라. 극복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싸워서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극복은 오직 하나의 독특하고, 어쩌면 유일한 존재가 되라는 말이다.
우쩐에서 잠간 쉬면서 물에 의지하여 기거하며, 물을 베고 잤다. 서책, 동책의 수문은 여전히 물의 도시 우쩐의 역사의 표식이 되었다. 하나하나의 푸른 이끼로 뒤덮인 아치형 다리들은 물속에 잔잔히 떨리는 물 위에 그림자를 던진다. 다리는 일종의 약속된 비유이며, 동서양 예술의 융합 관통을 상징한다. 여기서 다시 연결되는 차안(此岸:피안에 대비되는 언덕)은 없고, 피안에 다다를 방법도 없다. 물속에 우뚝 서있는 목심 미술관은 무쩐이 후세에 남기는 문화유산인 동시에 미래를 향한 ---- 존경이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에 대하며 쓰지 말라. 여러분이 쓰는 것은 좋지 않다. 하지만 나는 우쩐을 떠난 후, 이런 말을 참지 못하고 썼다."
옛사람들의 문화와 생명이 같이 있으면서, 생명이 서로 문화에 침투되면, 생명은 사라진다. 우리가 기껏 얻을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물에 비친 그림자일 뿐이다.... 바람이 일어나고.... 물에 비친 그림자가 반짝반짝 빛나다 부숴지면.... 바람이 다시 커진다면, 모두 사라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목심)
물에 비친 그림자는 말이 없다. 모든 물에 비친 그림자는 반대 방향으로 서있다.
원재 : <북경 청년보> 2016.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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