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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필, 단편소설

단락과 전체 (片段与完整) (六) : 吴昕孺 (끝)

 

부친의 뇌 위축증이 더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조기에 고정시키기 위해, 모친과 나는 모든 방법을 다 써보았다. 민간요법, 양방을 모두 써보았으나, 효과는 모두 시원치 않았다. 부친은 성질이 조급한 것 말고는 거의 도덕적으로 완벽했고, 담배와 술을 안 했으며, 재물을 탐하지도 않았고, 이름을 내세우려고 하지도, 색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가 우수 평가를 받을 순서가 되면, 남에게 기회를 주었고, 보수가 오를 순서가 되어도 남에게 양보했다.
그는 고향에 갇혀 지내느라 비록 자기의 인생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적지 않은 우수 학생을 가르쳐 세상에 내보냈다. 그중 한 명이 황 샤오허(黄晓鹤)로 미국에 정착한 지 여러 해 되었는데도, 부친은 후기에는 기본적으로 그녀가 미국에서 보내주는 약물에 의존하여 지탱했다. 그래서 의사가 예상한 생존 수명보다 여러 해 더 살 수 있었다.

부친은 병이 들자, 점차, 먼저 자기 아들 딸부터 못 알아보고 단지 "낯이 익은 사람"으로 알았다. 이어서 모친  마저도 못 알아보고, 밤에 자면서, 모친에게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다. 하지만 모친이 시야에서 잠시라도 없으면 안되었다. 모친이 조금이라도 신경을 덜 써서 그를 돌보지 않으면 그는 크게 성질을 부리며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문을 박차고  나갔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이니 오래 머물면 안된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집안에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꽤 여러번 부친이 슬그머니 문을 열고 나가서 없어지는 바람에 모친이 온 도시를 찾아 헤매곤 했다. 언젠가  한번은, 모친이 류양 강변에서 부친을 찾아내었다. 놀라고 땀 범벅이 되어 있는데, 부친은 모친을 보더니, 싱글벙글 웃으며말했다. "아이고, 어떻게 왔어, 오래간 만이야!" 모친이 그 말을 듣자, 화났던 것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21세기가 되자, 부친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침대에 눕게 되었고, 모친의 부담은 더욱 무거워졌다. 우리는 일하느라고 바빠서, 고작해야, 이틀 연휴 때나 보러 갔는데, 특히 2002년 내가 주관한 <대학시대> 잡지사의 일상 업무 후, 평일의 한가로웠던 세상이 순식간에 사방이 캄캄해졌다. 2005년 나는 결국, 자기 스스로 너무 혹사시켰던 나머지, 한달간 입원했다.

 

부친의 상황 은 나날이 악화하였다. 머리가 벗겨지고 이가 빠졌으며,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헤 벌렸다. 매사 형세가 산란하고, 정신이 또렷하지 않았다. 2003년 말, 병원에 입원하자, 다음해 음력 설날에도 모친은 집에서 병원 두곳만 쉬지않고 빈번히 왕래하였다. 2004년 정월 16일, 병원은 세번째 위독하다는 통지를 했다. 급히 병실에 가니, 부친의 두 콧구멍에 산소 공급장치가 꽂혀있는 것이 보였다. 손은 많은 주사바늘 자국으로 온통 검붉게 변해있었다. 이불을 젖히자, 부친은 전신이 부어올랐고,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의식이 희미하게,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호흡이 없는 것 같이 보였는데, 부친은 사실 이미 생명의 흔적이 사라졌다. 

외삼촌이 더 이상 무의미한 치료를 중단하여, 부모 두사람이 서로에게서  벗어나게 하자고 했다. 모친은 펑펑 눈물을 흘렸다. 이모가 한쪽으로 나를 잡아 끌더니 말했다. "얘야, 이일은 네가 주관해야 한다. 네 엄마는 마음이 여리지 않니. 이렇게 계속 내버려두면 모두 죄받는다."
나는 부친 옆으로 가서 가볍게 그의 이마와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런다음 주치의에게 산소 공급을 중단해  달라고 말하고, 부친을 집으로 데려 왔다. 이날, 밤 9시, 부친은 편안히 잠들었다.

부친이 병이 든지 10년, 모친은 그와 촌보도 떨어지지 않았다. 부친의 일생은 그리 잘 풀렸다 할 수는 없지만, 모친이 있었기에 그는 진정으로 행복했다. 모친의 일생은 훨씬 다채롭고 기복이 많았지만, 부친의 사랑과 부친에 대한 진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 또한 충분했다. 부친을 안장 하던 날, 모친은 부친의 유골함을 껴안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다음 생에서도 우리 여전히 부부로 삽시다." 나는 금새 내가 썼던 모친에 대한 글이 떠올랐다. "다음 생에서도 우리는 모자지간이 될거예요." 나는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서 웃음이 나왔다. 얼마나 좋은가, 다음생에서도 나는 역시 나, 그들은 역시 나의 부친, 모친이 되게 생겼으니.

부친이 떠난 후, 우리 자매들이 마음을 먹고 모친을 격려하려고 여러번 놀러갔다. 누나는 모친을 모시고 계림, 장강삼협, 형산을 다녀왔고, 모친과 이모를 함께 모시고 북경도 갔다. 또 모친 친구들과 구룹을 만들어 상해, 소주, 남경, 태국, 캄보디아 등지 여행을 보냈다. 모친은 21세기 의 중국과 세계를 보았다. 현재는 다시는 1954년 같은 잔혹한 홍수가 있을 수 없고, 다시는 1959년 대약진 운동 때 처럼 엄중한 수탈로 사람이 굶어 죽을 리도 없고, 다시는 무지스런 언론이 "문화혁명"이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사건도 일으킬 리 없을 것이다. 모친은 북경올림픽과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잇달아 보았고,. 뉴스방송이 하루종일 끊이지 않는 것을 보았다. 또 자주 패션쇼나 각종 재미있는 프로를 보고있다. 나 역시, 계속 글을 쓰고, 발표한 글이 출판되어 나오면 모친에게 보여준다. 그녀는 여전히 모든 글을 그렇게나 진지하게 읽어보고, 손님이 올 때마다, 손 가는대로 집어들고, 손님에게 보여주며 담담하게 말한다.
"이것 좀 봐, 우리 아들이 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