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대학 첫여름방학, 나는 샨지엔펑(沈剑峰), 류안화(刘安华), 지롱회(吉荣华) 이렇게 동급생 세 사람과 후난 성 서북지방을 자비를 들여 돌아보기로 계획했다. 부친은 허락하지 않았지만, 나는 모친에게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모친이 돈이 얼마나 드냐고 물어서 나는 장학금 받은 돈 100元이 있다고 했다. 모친은 거기 더해서 50元을 주었고, 은사 다이 하이(戴海)가 장행을 위한 돗자리 삼아 <호남일보>에 단신 보도로 실어 주었다.
우리는 장사에서 기차를 타고 마양(麻阳)으로 가서, 거기서 다시 봉황, 왕촌, 영순, 길수, 상식, 천자산, 장가계를 갔다. 한 달 간의 여정은 천여 리(500km)였고 일인당 쓴 돈은 겨우 120元이었다. 특히 영순에서 산을 넘 고물을 건너 인적이 드문 "마풍촌 (문둥이 촌)"에 갔었다. 마풍촌에 간 날은 앞으로 영원히 뚜렷하게 내 기억 속에 조각될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 넷은 춥거나 덥거나 늘 함께하는 형제처럼 가까워졌다. 가슴 아픈 것은 4년 전, 원 강시(沅江市) 1 중학교 교감으로 임명된 류안 화가 장사에 와서 병을 치료하던 도중 뜻밖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나와 지엔펑, 롱화, 그밖에 10여 명의 동창이 밤을 새워 원강까지 그를 배웅해 주었다. 폭죽이 요란하게 터지고, 불꽃이 어지럽게 날리는 가운데 고인은 갑자기 저 세상으로 떠났다. 남은 우리는 어찌 견디라고!
대학 4학년 동안 나는 연속해서 학생시대의 영광을 이어갔다. 총학생회 부회장이 되었고, 문학사 부사장이 되었고, 사범대학 첫 번째 "양수달 장학금"을 받았다. 이때, 모친은 좌골신경통을 치료하려고 너무 많은 한약을 먹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 하지만 자식의 좋은 소식과 가정 화목은 그녀의 행복지수를 급상승시켰다. 어느 해에는, 그녀의 학교에서 표를 보내주어, 우리 모자 둘이 시내에 있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았는데, 극장을 꽉 메운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모두 울음을 터뜨려 극장이 완전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나는 처음으로 모친과 관계된 글 를 썼다. 말미에 쓴 말은, "나는 다음 생애에도 여전히 모자간으로 살겠다!"이었다.
1987년 7월, 우리집에서는 옛 루어 링 집을 팔아버리고, 부친이 일하는 랑리(榔梨) 시에 거주할 집을 짓기로 하였다. 부친은 나에게 외출하지 말고 집에서 벽돌을 나르고, 흙을 져나르라고 지시하였다. 나는 원하지 않았지만, 말을 안들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공정은 본래 사람을 사서 하는 것이었고 그런 일은 사실 우리들이 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부친은 나의 투지를 유발하기 위해, 본인이 쉬지 않고 벽돌을 나르고, 흙을 져 날랐다. 마치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나는 입이 부르퉁해졌는데, 바람을 부르고 비를 내리게 하는 대학 교정 시인이 어디서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나 싶었다. 내가 일부러 어슬렁어슬렁거리매, 요령을 부리자 부친이 다짜고짜, 뛰어들어 나를 후려쳤다. 그 고통은 빠르게 20세 먹은 나를 눈물이 나게 했다.
지금 생각이 나는데, 모친의 위대성은, 부친이 나를 저벌할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지만, 부친과 맞서면서 나를 감싸주었는 데 있다. 그녀의 마음은 나보다 쒈씬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그날 저녁, 부모가 무겁고 낮은 음성으로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부친은 모친의 말에 설득당해서 벙어리가 된 듯 한마디도 못했다. 그다음 날부터 나는 막노동꾼에서 문인이 되었다. 그 일은 부친이 마지막으로 나를 때린 사건이었다.
졸업하기 전날 밤, 모친은 우리 학교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영향을 받을까봐 서둘러 다른 사람에게 부탁 하머, 전갈을 보냈다. "외할머니가 위중하니 속히 돌아오너라." 어느 누가 외할머니가 우리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크게 자리하고 있는지 알겠는가? 나는 만사 제쳐놓고 집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집에서 웃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들어보니 모친이 나를 걱정하여 꾀를 써서 나를 돌아오도록 일을 꾸민 것이다. 막 3월이 지나가고, 내가 졸업 후 학교에 남아 출근한 지 채 30일이 안되었는데, 누이동생이 황급히 뛰어들어오먼서 소리 없이 울었다. "외할어 네가 돌아가셨어!" 외할머니가 집에 있다가 갑자기 뇌일혈이 발생해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외할머니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 채, 옥황상제가 불러서 천당으로 가신 것이다. 나는 이일로 모친에게 화를 냈다. 6월에 했던 말은 말이 씨가 될 수도 있었으니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다고 말했다. 나는 꽤 오랫동안, 모친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는데, 뜻 밖에 모친으로서는 어머니를 잃은 더욱 큰 고통을 받는 줄 나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나 역시 장시간, 외할머니와 지낸 날들에 외할머니를 살뜰하게 보살피지 않았다는 생각에, 외할머니에 대한 글을 매우 쓰고 싶었으나 게으름 탓에 늦게라도 붓을 들지 않았다. 외할머니의 10주기 제사가 다가오자 나는 그제야, 장편 수필을 썼고, 잡지에 실었다. 자기 내심에 대하여 대충 고백한 셈이다.
대학 졸업 후, 나는 정치에 참여할 비교적 좋은기회가 있었지만, 심사숙고해보고 역시 한 명의 편집기자가 되는 길을 선 댁 했다. 그때, 불교와 선에 관한 서적을 힘들게 공부하고 있었는데, 1~2백 권을 확실히 이해하는데, 1년이나 걸렸다. 비록 마음이 고요한 물과 같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상적인 항해로 문학의 피안을 향해 출발할 수 있었다. 내가 모친에게 이일을 이야기하자 모친은 웃기만 할 뿐,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모친이 소녀시절 갖고 있었던 농민작가의 꿈이 생각났던 것이 아닐까?
나는 매번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견본은 어떤지, 신문에는 어떻게 났는지, 간행은 어떻게 되었는지 하나하나 모친에게 보여주었다. 매번 모친은 반드시 일부러 시간을 내어 진지하게 읽어보면서도, 좋다 혹은 나쁘다 라고 말한 적이 거의 없었다. 다 읽고나서, 한 군데 가지런히 잘 쌓아두고, 손님이 오면 손 가는 대로 꺼내 보여주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내 아들이 쓴 거요." 그런 다음, 열심히 손님이 그녀의 아들에 대해 칭찬하는 말을 경청하였다.
1994년, 안좋은 큰일이 일어났다. 부친이 병든 것이다. 80년대 말, 부친은 자전거를 타고 시골에 내려가 검열 업무를 했는데 잠깐 부주의하여, 깊은 도랑으로 떨어져,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비록 건강을 회복했지만 그 후 노인성 치매라는 후환이 남았다. 1994년 초가을, 부친에게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밥을 하는 중간에, 밥솥을 열어 쌀을 꺼내 씻기도 하였다. 나는 부친을 모시고 상야 병원에 가서, 뇌 위축증 ----노인성 치매 증상의 의학용어, 확진 판정을 받았다. 부친은 자기가 다른 중병에 걸린 줄 알았다. 우리가 두 번 세 번 설명했지만, 그는 끝내 의심으로 가득했다.
※ 재미있는 표현
泪水成了洗发水: 직역하면 눈물이 샴프가 되었다는 말인데 그냥 눈물바다가 되었다로 해석.
解甲从文 : 갑옷을 벗고 문신이 되다 라는 말인데 문장 앞 뒤에 맞춰 노동꾼에서 문인이 되었다고 의역.
一语成谶 : 말이 씨가 된다.(원래 우리나라 속담인 줄 알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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