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의 집, 루어링(罗岭)은 모친 집 금강에서 약 15km 떨어져 있다. 어렸을 때 우리는 자주 외할머니 집을 왕복으로 오갔다. 부친은 키가 156센티였고 선천적인 짝눈이었는데 사범대학시절 정부의 무료 치료를 받아 잘 나았다. 모친 집은 가난하였는데 집안에는 언제나 몇 명씩은 식구가 있었다. 부친 집도 역시 가난했고, 집안에는 두 노인네까지 있었다. 그의 누나와 여동생은 모두 이들을 피하여 늘상 피난을 나갔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시집 간 큰고모와 작은 고모가 친정에 돌아왔다. 그녀들 중, 한 사람은 장사 시내에 살았고 한 사람은 오미(五美) 촌에 살았는데 둘 다 괜찮은 집에 시집을 갔다.
부모가 결혼한 지 두해째, 우리 누나가 태어났고, 그로부터 2년 후 내가 태어났다. 다시 2년 후 여동생이 고고성을 지르며 세상에 인사를 했다. 집안이 꽉 찼다. 나는 "应运而生(운에 따라 태어난다)"이라고 여겼다.
1967년 초,"문화대혁명"의 불길이 요원하게 전국을 덮었다. 소질이 우수했던 모친은 결석한 상황에서 공사혁명위원회 주임으로 선출되었다. 모친은 완강히 고사했다. 상부 역시 강경하게 사퇴를 허가하지 않았으나, 결국, 모친은 임신했다는 사유로 이 "주임" 자리를 끝내 고사했다. 그녀의 배속에 있었던 아이는 바로 나였다. 나중에 내가 모친에게 당시 왜 그렇게 그렇게 강경한 태도를 취했는지 물었다. 모친이 대답하기를, 사청 운동(四清运动: 1963년 전개된 사회주의 교육 운동)을 진작시킬 때 그녀는 고향에서 마을 사람들이 한 성실한 생산 대장을 때려서 불구로 만들고 정치에서 추방시키기로 결정하는 것을 보았고 그것을 반면교사 삼았다고 했다. 이것과 내가 1989년 대학 졸업 후에 결정한 것이 어쩌면 이렇게 똑 닮았는지!
누나, 나, 여동생은 모두 구목중학에서 태어났다. 이 학교가 언제 양돈장으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공장으로 운영되다가 나중에 문을 닫은 것 같은데, 전체 윤곽은 지금 까지도 눈에 선하다. 우리는 지금도 이모와 외삼촌 집에 가면 늘 거기를 지나간다. 구목 중학이 나에게 준 인상중 제일 깊은 것은 방공호였다. 내가 울고 난리를 피우면 인내심 없는 부친이 나를 캄캄하고 몇 구비 구불구불한 동굴 안에 내버려 두곤 했다. 사실, 나는 여섯 살 반 이전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외할머니 집에서 보냈다. 외할머니는 내가 때어 날 때 양수를 삼켜서 체질이 좋지 않고 했다. 내가 한 살 전, 제일 친했던 친구는 감기 바이러스였고, 백일해로 하마터면 죽을 뻔하기도 했다.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나와 누나, 여동생의 어린 시절은 모두 금강하구에서 보냈다. 나는 왜소하고, 비쩍 마르고, 새까매서 마치 한 마리의 미꾸라지 같았고, 언제나 물을 텀벙대며 소리를 냈다. 나는 금강의 꼬마대장이 되어, 조무래기들을 이끌고 괴일 따먹기, 오이 서리, 망국노(亡国奴) 놀이를 했다. 나중에 커서 알게 되었는데, 내가 꼬마대장이 된 이유는 내가 재주가 많아서가 아니었고 외할어니와 모친이 그곳에서 명망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문숙도의 아들"이라는 신분증은 금강의 어떤 곳에서도 통하는 특별 통행증이었고 등록된 카드였으며, VIP 카드, 양해각서와 평화 합의서였다.
'중국 수필, 단편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락과 전체 (片段与完整) (四) : 吴昕孺 - 1/2 (0) | 2021.06.26 |
---|---|
단락과 전체 (片段与完整) (三) : 吴昕孺 - 2/2 (0) | 2021.06.23 |
단락과 전체 (片段与完整) (二) : 吴昕孺. - 2/2 (0) | 2021.06.20 |
단락과 전체 (片段与完整) (二) 吴昕孺. - 1/2 (0) | 2021.06.18 |
단락과 전체 (片段与完整) (一) - 이글을 어머니에게 바친다. 吴昕孺 (0) | 2021.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