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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필, 단편소설

단락과 전체 (片段与完整) (三) : 吴昕孺 - 1/2

 

부친의 집, 루어링(罗岭)은 모친 집 금강에서 약 15km 떨어져 있다. 어렸을 때 우리는 자주 외할머니 집을 왕복으로 오갔다. 부친은 키가 156센티였고 선천적인 짝눈이었는데 사범대학시절 정부의 무료 치료를 받아 잘 나았다. 모친 집은 가난하였는데 집안에는 언제나  몇 명씩은 식구가 있었다. 부친 집도 역시 가난했고, 집안에는 두 노인네까지 있었다. 그의 누나와 여동생은 모두 이들을 피하여 늘상 피난을 나갔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시집 간 큰고모와 작은 고모가 친정에 돌아왔다. 그녀들 중, 한 사람은 장사 시내에 살았고 한 사람은 오미(五美) 촌에 살았는데 둘 다 괜찮은 집에 시집을 갔다.

부모가 결혼한 지 두해째, 우리 누나가 태어났고, 그로부터 2년 후 내가 태어났다. 다시 2년 후 여동생이 고고성을 지르며 세상에 인사를 했다. 집안이 꽉 찼다. 나는 "应运而生(운에 따라 태어난다)"이라고 여겼다.

1967년 초,"문화대혁명"의 불길이 요원하게 전국을 덮었다. 소질이 우수했던 모친은 결석한 상황에서 공사혁명위원회 주임으로 선출되었다. 모친은 완강히 고사했다. 상부 역시 강경하게 사퇴를 허가하지 않았으나, 결국, 모친은 임신했다는 사유로 이 "주임" 자리를 끝내 고사했다. 그녀의 배속에  있었던 아이는 바로 나였다. 나중에 내가 모친에게  당시 왜 그렇게 그렇게 강경한 태도를 취했는지 물었다. 모친이 대답하기를, 사청 운동(四清运动: 1963년 전개된 사회주의 교육 운동)을 진작시킬 때 그녀는 고향에서 마을 사람들이 한 성실한 생산 대장을 때려서 불구로 만들고 정치에서 추방시키기로 결정하는 것을 보았고 그것을 반면교사 삼았다고 했다. 이것과 내가 1989년 대학 졸업 후에 결정한 것이 어쩌면 이렇게 똑 닮았는지!

누나, 나, 여동생은 모두 구목중학에서 태어났다. 이 학교가 언제 양돈장으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공장으로 운영되다가 나중에 문을 닫은 것 같은데, 전체 윤곽은 지금 까지도 눈에 선하다. 우리는 지금도 이모와 외삼촌 집에 가면 늘 거기를 지나간다. 구목 중학이 나에게 준 인상중 제일 깊은 것은 방공호였다. 내가 울고 난리를 피우면 인내심 없는 부친이 나를 캄캄하고 몇 구비 구불구불한 동굴 안에 내버려 두곤 했다. 사실, 나는 여섯 살 반 이전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외할머니 집에서 보냈다. 외할머니는 내가 때어 날 때 양수를 삼켜서 체질이 좋지 않고 했다. 내가 한 살 전, 제일 친했던 친구는 감기 바이러스였고, 백일해로 하마터면 죽을 뻔하기도 했다.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나와 누나, 여동생의  어린 시절은 모두 금강하구에서 보냈다. 나는 왜소하고, 비쩍 마르고, 새까매서 마치 한 마리의 미꾸라지 같았고,  언제나 물을 텀벙대며 소리를 냈다. 나는 금강의 꼬마대장이 되어, 조무래기들을 이끌고 괴일 따먹기, 오이 서리, 망국노(亡国奴) 놀이를 했다. 나중에 커서 알게 되었는데, 내가 꼬마대장이 된 이유는 내가 재주가 많아서가 아니었고 외할어니와 모친이 그곳에서 명망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문숙도의 아들"이라는 신분증은 금강의 어떤 곳에서도 통하는 특별 통행증이었고 등록된 카드였으며, VIP 카드, 양해각서와 평화 합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