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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필, 단편소설

단락과 전체 (片段与完整) (二) : 吴昕孺. - 2/2

 

1962년, 모친은 일찍부터 그녀 인생 영예의 절정에 달했다. 

장사(长沙) 현에서 오직 두 명의 대표 중 한 명으로 선발되어 후난 성 첫 번째 귀향 지식청년대표대회에 참가한 것이다. 다른 여자 참가자는 핑지엔(冯建)인데 양돈 노동 모범 대표였다. 핑지엔과 얼마 전 뜻하지 않게 세상을 떠난 레이펑(雷锋)은 좋은 친구였다. 그들과의  밀접한 서신왕래는 조직도 한동안 펑지엔과 레이펑은 친구라고 인정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 장사현은 매우 컸고, 현재의 장사현과 왕청(望城) 현을 포함하고 있었다. 테이 퍼과 펑지엔은 실제로 모두 왕청현 사람이었다
펑지엔은 레이펑의 사진을 한 장을 모친에게 보냈다. 나는 소학교 때, 모친의 사진첩에서 이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대략 여름철에 찍은 사진인데, 레이펑은 조끼를 입고, 총을 메고 있었고 매우 잘생겼다. 유감인 것은 장사에서 온 펑(彭)씨 성의 지식청년은 우리 모친과 같은 루링소학교 교사였는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사진을 빌려다 레이펑의 모습을 그리겠다 하고는 신중하지 못해 그 사진을 잃어버린 것이다. 매번 잃어버린 사진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모친은 얼굴을 찌푸리며 아까워했다.

 

모친도 본래 등룡문의 기회가 있었다. 펑지엔은 후난 성 첫 번째 지식청년 대회 대표로 북경에 가서 모 주석의 접견까지 받았지만 모친은 오히려 그녀의 마을로 돌아와 고향 친지들과 계속 하나가 되었다.


1963년 8월, 장사현 정부와 왕청현 정부는 분리되었고, 각각 모친과 펑지엔을 후난 성 농업대학에 가서 공부하라고 추천했다. 펑지엔은 농업대학에 갔고,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와 농업기술 간부가 되었다. 모친은 사전에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는데, 농업대학에서 합격통지서를 인민공사(人民公社 : 중화인민공화국 농촌 조직)에 보냈다. 인민공사 쒸(徐) 사장이 이것을 보고 말했다. "숙도(淑桃)는 집이 가난해서 대학보다는 일자리를 주는 것이 맞아!" 그는 현으로 달려가 모친을 민영 학교 보조교사가 되게 해 주고, 농업대학 합격통지서는 자기 아들에게 주었다. 쒸사장이 남의 공을 가로채는 것 같은 진상을 말하며, 오히려 모친에게 그에게 고맙다 하라고 까지 했다. 모친은 비통해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어느새 1964년이 되었다. 21세의 모친의 경력은 여러가지로 부침이 심하고, 자유분방했다. 그런 가운데, 부친과의 결혼을 결정했다. 부친이 장사 사범대학 러시아어과를 졸업하고 구목중학교에 배치되어 왔을 때, 모친은 이미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지금 부친의 로맨스를 그럴싸하게 꾸며 이야기 하겠다. 부친은 일생동안 공산당에 감격해 마지않았는데, 그의 선천적 짝눈을 당(党)이 잘 치료해준 데다가, 그가 사범대학에서 공부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공부한 전공 러시아어는 운 좋게 러시아 여학생을 친구로 사귀게 해 주었고, 서로 편지를 교환하고, 두터운 정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국가 간의 밀월관계가 사라지자 개인 간의 교제는 무슨 결과를 내기가 어려워졌다. 몇십 년 후, 부친의 이런 연애사를 모친이 우리에게 들려주었는데, 그때, 부친은 담배를 꺼내 물고, 망연히 먼 곳을 응시했다. 우리는 그가 러시아어 몇 마디 주워 넘길 때 소리를 지르며 좋아했는데, 당초 러시아어로 유창하게 속마음까지 토로했던 그가 이제 와서 기껏 기억하는 러시아어 한마디는 "이것은 만년필입니다."였다

국경을 뛰어 넘는 연애에 실패하고 나서 부친은 다시 진용을 가다듬어 같은 반, 위(余)씨 성의 여학생과 연애가 이어졌다. 졸업할 때, 이 여자 친구를 데리고 루어링(罗岭)의 집으로 왔다. 기껏 두 칸 방 밖에 없는데, 사방이 식구들로 꽉 찼고, 늙은 모친과 모친보다 더 늙은 할머니도 있었다. 위 아가씨는 루어 링을 떠나자마자 바로 편지로 이야기가 끝났음을 알렸다. 부친은 격분한 나머지 단숨에 8페이지의 편지를 썼다. 그리고는 그녀가 혹시 못 받아 볼까 봐 직접 그것을 들고 우에루어 산(岳麓山) 뒤편 언덕에 있는 그녀의 집으로 기서, 거기 더하여 펜으로 그녀가 천하에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한바탕 욕을 썼다.

 

부친이 구목중학에 온 후, 자주 동료들과 모친의 집에 왔는데 모친은 구목 중학의 우수 교우였고, 많은 교사들과 친구로 지냈다. 부친을 모친 반의 담임을 맡았던 적이 있는 양 씨 성의 동료가 중매를 섰다. 모친은 많이 생각하지 않고 이 혼사를 받아들였다. 대략 내가 소학교 삼 학년 때, 양 씨 어르신이 우리 집에 손님으로 와서 내가 장기를 둘 줄 안다고 들었다면서 한판 겨루자고 했다. 양 씨 어르신의 콧등 위에는 안경이 올려져 있는데 안경알이 두터워 후면의 눈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급한 중에 꾀가 난다고 상(象) 둘로 느닷없이 적진으로 들어가 그의 기물을 남기지 않고 잡아버렸다. 그는 장기에 졌으면서도 풍격이 대단했다. 나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척 올리며 "신동(神童), 신동." 하고 외쳤다.
부친이 말했다. "양씨 어르신은 구목 중학의 장기 챔피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