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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필, 단편소설

단락과 전체 (片段与完整) (二) 吴昕孺. - 1/2

장사현 풍경 사진을 그렸는데 초가집과 검은 개는 그냥 그려 넣었습니다.

 

 

모친이 혼자 그릇 궤짝을 꺼내려고 홍수에 빠졌던 것은 동네 사람들에게 미담으로 전해져, 시골 동네에 돌아다녔다. 기적적인 일로 전해지기도 하고 거기다 보태져서 혼자 어머니를 구했다는 식의 전설로 남기도 했다. 모친은 키가 컸고, 일찍 철이 들었으며 면목이 수려했다. 큰 난리를 당하여 그녀가 보통사람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할 일을 해냈다는 것을 못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보통이 아닌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인민공사는 전체 사원을 굶게 만들었고, 설상가상 3년 연달아 자연재해가 났다. 키가 크고 좋은 신체를 유지하던 외할아버지는 굶어서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었다. 앙상하게 마르고 키가  크다 보니 사람 가죽을 세워놓은 것처럼 보였다. 이 사람 가죽이 결국 꺼져버렸다. 외할아버지는 한번 쓰러지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1959년, 외할아버지는 산채로 굶어 죽었고, 외할머니는 그때부터 과부로 수절했다. 햇수로 쳐서 장장 40년이다.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노동력의 결핍으로 집안은 더욱 곤궁해졌다. 그때 사람들은 대지처럼 넓고 관대하고, 순박해서 꽤 많은 사람이 그들을 도와주었다. 나이 어린 외삼촌만 제외하면 외할머니 집안은 한 줄로 세우면 전부 여성이었다. 외할머니의 할머니, 외할머니, 이모, 엄마, 막내 이모.

외할머니의 할머니는 나이가  많아서 일을 안했고, 외할머니는  집안일을 도맡아서 했다.  이모는 전념해서 일을 하연서도 별로 말이 없는 사람이었고, 막내 이모는 막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만약 집안에서 한 사람을 내세운다먼, 오직  모친밖에 없었다. 모친은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왜냐하면 집안에 처박혀 있으면 국면을 바꿀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모친은 벌써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6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한 가지 기회가 될 수도 있는 소식을 들었다. 현(县) 문화관에서 농민작가를 초빙한다는 것이다. 조건은 장편소설의 독후감 한편, 고향에 대한 수필 한편 그리고 시대감이 풍부한 시를 한편 써야 한다는 것이다. 잘 쓴 사람은 문화관에 가서 20일간의 훈련을 받는 혜택을 받게 되어있었다. 젊은 모친은 문학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으나 무턱대고 신청했다. 그녀는 생산 대장의 집에서 <홍암(紅岩)>을 한 권 빌려다가 <홍암>의 독후감을 한편 썼다. 고향에 대한 수필은 민병대에  참가했을 때  느꼈던 것을 썼고 <금강 청송(金江青松)>이란 제목을 붙였다. 시도 잘 썼는데 함께 문화관에 부쳤다. 본래 문학 기초가 약하다 보니 모친은 별로 큰 희망을 품지 않았다. 오래도록 아무 소식도 없자 이 일이 어찌 되었나 궁금하지도 않게 되었다.

몇 달이 지난 후, 그녀는 문제가 매우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첫째, 그녀는 문화관에서 보낸 창작 자료를 받았는데, 자료에서 그녀를 수강생이라고 부른 것이다. 둘째, 그녀는 의외로 북경에서 보내온 <중국 청년> 잡지와 8元의 원고료를 받았는데, 잡지 겉면에 분명하게 그녀의 <금강 청송>이 게재되어 있었다. 이상했던 것은 글을 문화관에 보냈던 것 말고는 그녀는 여태껏  아무 데도 투고한 기억이 없었다.

오래지 않아, 내막이 모두 드러났다. 알고 보니 쑤(粟) 성을 가진 모친의 사촌언니가 시골에서 현 문화관이 보낸 모친의 훈련 합격통지서를 받아다가, 모친에게 전해주지 않고 자기가 "문숙도(文淑桃)"라고 속이고 거기에 갔다. 하지만 자기는 근본적으로 창작을 할 재주가 없다는 걸 발견하고 며칠간  수업을 받다가 그냥 돌아왔던 것이다. 그 당시는 우편이 개인의 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편지는  촌 생산 소비 합작사에서 제공한 접수대 한구 퉁이에 놓아두었는데, 아는 사람들은 상호 간에 대신 찾아가기도 했다. 모친 집은 촌 생산  소비 합작사에서 3 km 떨어진 곳에 있었고 그녀는 거기 자주 가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에는 신분증을 사용하지 않아서 내가 나는 아무개요 하면 내가 아무개인 그런 때였다. 생각지도 못하게 이번에 엉뚱한 사람이 시작만 대신해준 결과가 된 것이다.

창작 훈련이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고, 모친도 깊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너무 공부가 하고 싶었던 모친은 학비가 안 드는 농업 중학에 들어갔다. 예상치 못한 것은 농업 중학에서는 하루 종일 모래를 나르고, 강철을 정련하고, 시멘트 벽돌을 굽고 나서 저녁에 남의 집 사당에서 몇 가지 수업을 들었는데, 교사도 없었다. 모친은 정규학교인  구목 중학(九木中学) 시험을 치기로 결심했고 학교는 집에서 멀지 않았다.

그곳은 나중에 누나와 나,  여동생이 태어난 출생지가 되었다. 모친이 시험을 쳐서 학교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학비를 낼 형편이 못되었다. 외할어니는 1954년 대홍수 후 정부가 나눠 준 구호품 단풍목으로 만든 판자를 남겨두었다가 10元에 팔았다. 그것으로 모친이 중학교에서 공부하는데 겨우 한 번의 학비를 냈을 뿐이고 이후는  전부 장학금을 타서 충당했다. 중학교 졸업 전에 전국 중학생 고향 돌아가기 열풍이 몰아쳤는데 출신 좋고 태도도 좋지만 집이 가난한 모친은 다시 학교에서 야단법석을 쳐서 요란스럽게 집으로 돌아왔다. 모친은 공산당 청년지부 대대에서 서기와 회계를 담당할 때 중점 간부 양성 대상에 선발되었고, 잇달아 현, 시의 각종 표창 회의에 참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