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두운 하늘에서 비가 그치지 않고 내리던 오전, 나는 팔보산 장례식장에서 두 군데 고별의식에 참석해 두 사람의 동료를 보냈다. 그들 모두 50이 좀 넘은 나이였고 이건 내가 제일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고별이었지만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맨 처음 누가 생각해냈는지 몰라도 생자와 사자의 최후의 헤어짐을 "고별의식"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식장에 모이는 것은 사자를 떠나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치 오랜 진구에게 "담에 봐 (再見)"라고 말하기 위해 모인 것 같다. 비통한 의식은 인간미가 충만하지만, 동시에 "고별"이라는 보통 단어에 슬픈 성분이 생겨나게 하는 것 같다.
당연히, 이건 고별의 본래 의미가 절대 아니다. 고별은 본래 매우 일반적이며 평상적인 행위이다. 사람의 일생에는 무수한 고별이 있다. 우리는 매일같이 고별, 그것도 끊임없는 고별 속에서 살아간다. 부모외의 고별, 아이와의 고별, 가족과의 고별, 동료와의 고별, 친구와의 고별, 고객과의 고별.... 이런 고별은 항상 보아온 것이니 신기할 것도 없고 대체로 별로 큰 슬픔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희열도 있고, 어떤 기대를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그래서 나는 "담에 봐(再見)"이라는 고별 용어를 마우 좋아한다. "再見", 잠시의 헤어짐은, 다시 서로 만나기 위한 것이니, 그런 기대는 사람의 마음속을 포근하고 따듯하게 느끼게 해 준다.
애석하게도, 모든 고별이 이렇게 온정에 넘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중 많은 고별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설령 생이별이나 사별이 아니라도 사람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게 한다.
내가 처음 고별의 고통을 안 것은 초등학교 때였다. 5학년 때쯤이었는데 큰형이 군대에 갔다. 입영하던 날, 나는 부모를 따라 형을 배웅하러 가서 부모의 슬픔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때, <다시 만나요! 엄마.(再见吧! 妈妈)> 라는 유명한 노래 가 나왔는데, 나는 지금까지도 이 노래의 가사와 멜로디를 기억한다.
다시 만나요! 엄마.
다시 만나요! 엄마.
군호가 이미 울렸어요.
강철 총은 이미 반짝반짝 닦았고,
행장을 이미 어깨 올러 메었네
부대가 출발해요.
엄마, 소리죽여 울지 마세요.
아들을 걱정하지 말아요.
.....
이 노래는 당시에 그야말로 고별을 위해 쓰인 곡이다. 그때 이후, 그 곡이 떠오를 때마다 부모님의 슬퍼하는 얼굴이 떠올라 나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
내가 직접 이별의 고통을 느낀 것은 대학에 들어간 해였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집을 멀리 떠났고, 부모를 멀리 떠났다. 자연히 대단한 마음의 압박을 받았다. 입학 신고를 하러 간 그날, 부친은 고집스럽게 일정 거리를 같이 가고 나서 또다시 일정 거리를 같이 갔다. 부친은 계속 엄숙한 표정을 지었는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얼마간 그를 두려위했다. 하지만 나중에 형이 편지를 보내서 알게 된 것은 부친이 집에 돌아와서 곧바로 침대로 달려가 한바탕 크게 울었다고 한다. 나는 그제야 우리들 자녀들 눈에는 강인해 보였던 부친이 이별을 마주하고는 뜻밖에 그렇게 부드럽고 정 많은 일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경험한 제일 어쩔 수 없는, 제일 슬픈 고별은 부친과의 고별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병세가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고, 나는 그날로 서둘러 집에 갔다. 하지만 집에서 여러 날을 기다려도 도무지 진전이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직장 일이 걱정되었는데 아마 모친이 그걸 알아차리셨는지 부친에게 무슨 말을 하신 것 같았다. 어느 날 부친이 나를 부르시더니 말씀하셨다. 너는 일이 바쁠 테니 집에 있지 말고 우선 돌아가거라. 만일 특수한 상황이 생기면 바로 연락할 테니 그때 다시 돌아오너라. 나는 "그럴게요"하고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서둘러 떠났다. 집을 떠나는 날, 나는 문을 나서며, 부친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시선을 보았는데 부친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치지 않고 흘렀다. 그것이 내가 본 마지막 부친의 시선이었으며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이번 생에서는 다시는 보기 어렵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지만, 어쩔 수 없이 모진 마음을 먹고 고별했다. 이것이 소위 생이별이라는 것일까?
사람의 일생은 무수한 만남과 무수한 고별로 이루어져 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있다. 이것은 아무도 도망칠 수 없는 숙명이다. 소동파는 이런 면에서 활달한 인물이었다. 그는 개탄했다. "사람은 슬픔과 기쁨, 헤어지고 만남이 있고, 달은 어둠과 밝음, 둥금과 이지러짐이 있다. 이것처럼 예부터 완전하기는 어렵다." 만나는 것은 흔연하고 헤어지는 것 역시 아무 유감이 없어야 한다. 이런 경계까지 이른다면 비록 좋기는 하겠지만 아마 극소수의 사람만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노력을 하든, 어떻게 아끼든, 아까운 생애에서 사람들이 소중하게 갖고 있던 모든 것들과 매일, 매시, 매분, 매초 ---- 하지만 언젠가는 이별의 날이 올 것이다. 이별의 시간을 마주하게 될 때, 우리 마음속에는 여전히 슬픔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마 나이를 많이 먹게 되어서 그런지 내 심성도 각별히 부드러워졌고, 각별히 민감해졌다. 친지 간, 친구 간 매번 이별할 때마다 언제나 나는 고통을 느낀다. 제일 두려운 것은 친지 간의 고별이다. 매번 집을 떠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웃으면서 가볍게 인사를 나눈다. 하지만 뒤돌아서면 내 심정은 바로 바닥으로 떨어진다. 부모님이 나이가 점점 많아짐에 따라, 나는 이별에 대해서 점점 공포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여러 번 친지들과 고별한 후 돌아오는 도중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7년 전, 업무관계로 어쩔 수 없이 홍콩으로 전근되었다. 떠나는 마음이 허 전하고, 거기다 전도가 불투명해서 나는 가슴 아팠다. 출발 날자를 기다리면서 나는 눈물을 머금고 <북경을 떠나며> 라는 수필을 썼다. 내가 쓴 "북경"이란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일종의 감정이 머무는 곳이다. 북경을 떠나는 마음속의 고통을 남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출발하는 날, 나는 혼자 짐을 들고 비행장으로 갔다. 나는 보안구역을 통과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걸었다.
홍콩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아이가 바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기숙사에 들어갔다. 매 주말마다, 아들은 집에 왔고 그날은 우리 전가족의 최고로 기분 좋은 날이었다. 우리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여러 가지 유치하고 웃기는 거동을 했다. 노래하고, 뛰고 집안에는 환성과 농담이 그치지 않았다. 우리는 아이와 함께 하는 즐거운 시간을 각별히 소중히 여겼다.
나는 알고 있다. 언젠가 어느 날, 그 애가 우리에게 점잖게 손을 흔들며 고별하리라는 것을.
원재 (文匯報 2016,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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