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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필, 단편소설

出鏡 4. (회면에 등장하기) : 南帆

 

노신(鲁迅)이 의학을 포기하고 문학에 종사하게 된 전고(典故 : 이유, 까닭)는 이미 많은 토론을 불러일으켰고, 교수들은 그것을 "환등기 사건"이라 불렀다. 교수들은 이 전고를 우화(話)로 보는 것을 거절했다. 그들의 지나치게 따지는 고증 벽은 이것을 이미 발생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확정 지었다. 이 때문에 이런 종류의 사소한 일들도 반드시 고증을 필요로 했다. "환등기 슬라이드가 사진이었나? 실물 보존은 어디에 되어있지? 어떤 시간에 보았을까? "


<함성>의 자서와 <후지로(藤野: 일본인 의사) 선생>에서의 서술은 얼마나 많이 차이가 나나? 실마리가 다른 토론 중에  한 가지 재미있는 문제가 점차 드러났다. 그것은 보는 것(看)과 보여지는 것(被看)이다. 죄수를 보는 "구경꾼", 죄수를 관찰하는 사람을 보는 "구경꾼" 노신, 그리고 노신과 함께 그것을 보는 외국학생 ---- 이들은 동시에 노신의 시선도 엿보았을 것이다. 서구인의 시야에서 "보여지는 것 " 동양---- 이는 사이드의 "동양학"에서 후에 식민(殖民) 이론의 의제가 되었다.

많은 사람이 보는 것(看)의 의미를 주동, 권력, 내려다본다는 뜻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일테면 "칼날같은 눈초리 "라고 하여, 시선으로 사람을 위협하는 것을 표현했다. 보여진다는 것(被看)의 의미는 피동, 받아들임, 타인의 시야 가운데 객체인데, 말하자면 동물원의 우리 안의 호랑이가 구경꾼의 오락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나 같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는 본다는 것과 보여지는 것은 거의 고정화된 단어의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히 고대의 배우는 "보여지는 것"으로 신분이 낮았다."광대"라는 호칭은 말할 것도 없이 깔본다는 의미가 은연중 포함되어 있다. 여권(女权) 주의자들은 광고에 나오는 여성의 이미지는 항상 "보여지는" 물체로 만들어지고, 영화의 섹시한 장면은 남성 의식의 시각적 욕망에 맞추어져 있다고 인식했다. 풍속이 거친 도시에서, 본다는 것과 보여진다는 것은 때때로 뜻밖의 격열한 충돌을 일으킨다.----차를 운전하다가, 사거리 교차로에서 적신호로 대기하고 있을 때, 옆 차의 실내를 여러 번 들여다보면 바로 치고받는 싸움이 유발될 수 있다. "당신 내가 뭐하나 보는 거야?" 이 짧은 한마디 말로 보여지는 것(被看)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싸움이 시작된다.

당연히 지극히 높은 곳에는 신(神)이 있다. 모든 사람이 무얼하든지 신은 하늘에서 다 내려다본다. 신은 현장에 직접 가지 않아도 일체 모든 것이 눈 안에 들어와 있다. 그래서 착한 일을 하면 보답을 해주고 악한 일을 하면 벌을 준다. 신은 필요할 때마다 몸을 변하여 속세의 행정권력이 된다. 고속도로의 입구, 은행 창구의 뒷면, 기차역의 대합실, 아파트 단지 내의 도로 같은 곳에 설치된 동등하지 않은 권력 부서 감시 카메라의 강대한 뒷배경이다. 

푸커의 묘사에 의하면, 제레미 벤담이 설계한 전경을 모두 볼 수있는 감옥의 설계는 눈의 패권적 철학 모형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의 거대한 안구가 높은 곳에서 감옥의 모든 구석구석을 내려다 보고, 모든 죄수는 몸을 감출 곳이 전혀 없다. 그래서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은 동시에 전혀 다른 상반된 평가 어휘로  존재한다.

노신이 화가 났을 때 한 말이 있다. 최고의 경멸은 말을 안하고, 눈동자 조차 돌리려 하지 않고 것이다 --- 다시 말해서 본다는 것은 존중할 때 필요한 것이다. "중시(重视)" 한다는 것은 칭찬의 뜻이 아닌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은 지도자나 명사들의 전유물이고, 보통사람 대다수는 TV 화면에서 자기 자리를 찾을 방법이 아예 없다.

 

어쩌면,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에 대하여 융통성 없게 등급을 설정한다는 것은 각주구검(刻舟求劍)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모든 현장의 주제, 공간의 장치 또는 특수설계가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상호 게임을 결정한다. 길거리에서 공연을 하는 예술인 혹은 술주정꾼의 이목을 받으려는 행패는 멸시를 받을 뿐이이지만, 대극장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핵심 주연배우는 특수한 존경과 영예를 받는다. 후자의 위엄과 명성은 무대가 마련해준 살아가는 수준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사람은 비밀스럽게 무대의 꿈을 감추고 있다. 하지만 휘황찬란한 대극장을 정복할 방법이 없으니, 셀카봉으로나마 근사한 장면이 나오는 무대를 제공받고 싶어 한다.
여기에는 의외로 전통적 성격의 너그러움, 겸손함, 함축과 부끄러워 머뭇거림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고개를 쳐들고 앞으로 나서는 것이다.
이때, 셀카봉은 하나의 강대한 욕망을 표현한다. "보여지고 싶은(被看) 욕망".

 

 

 

 

* 각주구검(刻舟求劍) [성어]  미련해서 사태의 변화를 무시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다. 융통성이 없어 사태의 변화를 모르다. [옛날, 초(楚) 나라 사람이 강을 건너다가 물속에 칼을 빠뜨리자, 칼을 빠뜨린 자리를 기억하려고 배에다 표시를 하고 나서 배가 정박한 뒤에 칼을 찾으려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