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 수필, 단편소설

5, 세월이 해결해 준다(日子是一种了却) - 何士光

 

나는 나도 모르게 글 쓰는 것을 멈추었고, 덩달아 잠깐 쉬었다.

호롱불 불꽃 속에 장모의 말이 그대로 들어와 불꽃과 함께 너울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말한 기장쌀이 익었다는 말은 내가 하는 일이 쓸모없다는 것이다. 또 먹고 마시는 것, 모두 그녀가 집으로 가져온 것이라는 말은 이 집 식구들은 모두 그녀가 먹여 살린다는 말이다. 나는 세심하게 장모의 마음을 헤아려보았고,  한층 더 깊은 속 마음을 알았다. 

그것은 바로 내가 그녀에게 불복종한다는 것, 그녀에게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녀에게 공손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어투에서, 그리고 그녀의 냉랭하고 나를 하찮게 보는 시선에서 내가 눈에 거슬리고 불만스러우며 나아가 일정 부분 멸시와 꼴불견으로 보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장모의 마음을 체득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의심이 많아서거나 지나치게 염려해서 그런 것이 전혀 아니다. 사람이 어떻게 자기 생각을 굳혀가느냐 하는 것은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알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예측해서 그러는 수가 많다. 그래서 선현들이 말하기를 知人者智, 自知者明라고 하지 않았던가?

(知人者智, 自知者明 : 다른 사람이 현명한지 아닌지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자신이 현명한지 아닌지 아는 사람은 더 대단한 명철한 사람이다)

 

나는 이론가들이 말한 타당한 말을 알고 있다. 한알의 씨를 심는 것을 시작으로 가을에 양식을 수확하고, 나아가 그 양식으로 먹을 것을 만들고 하는 전 과정을 모두 농민은 혼자서 또는 협동으로 완성시킨다. 이렇게 자급자족을 하기 때문에 농민들은 고집과 자신감아 생기기 쉽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 집을 전부 장모가 먹여 살리는 것은 아니다. 장모가 그렇게 말하는데 대해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식구들이 각자 자신의 노동을 통해 이 집을 유지시켜 나가는 것을 장모는 어찌 보지 못할까?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한집안의 주인으로서 오직 그렇게 생각하려 하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면 백번 다시 상상을 해서라도 그것을 진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거짓이라도 백번을 반복하다 보면 진리가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 집의 주인이라도 명실상부한 주인이 되지 못하게 되니까.
특히 장모는 일생 동안 불행한 일을 많이 겪었고, 점점 늙어가고 있으니, 이렇게 묘사된 상황 속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고 더불어 이렇게 묘사된 상황을 이용해서 자신을 지탱해 나가는 것이리라.

밤이 깊어지고 이웃사람들이 돌아갔다. 박새가 "꾸이 꾸이양"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밤의 심연 속에서  전해져 왔는데, 매우 편안하고 부드럽고 따스한 느낌을 주어 나는 가슴이 먹먹했다. 내 마음은 그 소리에 젖어들었고 나는 우리들이 말하는 효(孝)라는 글자에 대해서 그것이 어떤 발원지에서 시작되어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오게 되었을까 생객에 잠겼다. 농사꾼의 눈으로 보면 혈연면에서 자녀는 자기에게 종속된 사람이고 재산면에서 자녀는 재산의 일부이다. 만약에 그들에게 애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희망의 기탁 혹은 관심 가는 소식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왕 자녀의 일체, 생명과 의식(衣食)을 포함해서 모두 부모가 주었으니, 자녀는 부모에 대해 반드시 감사하고, 순종하고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효의 함의이다. 나아가 우리의 <24가지 효>를 보면 王祥臥氷(왕상이 한겨울에 모친이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자 얼어붙은 강 얼음 위에 누워 잉어를 얻었다는 고사), 老萊子娛親(노래자가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70 나이에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는 고사)가 있는데, 이런 것들 일체가 보통 사람이 가까이할 수 없는 도리의 경지다. 노신(魯迅) 선생은 이렇게 까지 말했다. "그것은 정(情)이 아니라 윤리의 기준일 뿐이다. 사실 육친 간에는 저절로 진실하고 친밀한 감정이 생기는 것이니, 본래 이런 식으로 孝를 비뚤어지게 표현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하면 불가피하게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고 자신도 다친다. 만약 반대로 자녀의 시선과 마음으로 본다면, 부모의 신상에 어떤 글자를 찾아다 붙일 건가? 또 그렇게 되면 어쩌겠는가?

 

아천에 살 때, 나는 매일 학교에 갔다. 학교는 작은 거리 옆에 있는 작은 학교로 학급 몇 개가 전부인 초급중학교(한국의 중학교)였다. 학교에는 버드나무에 설치한 쇠파이프 중간에 북을 걸어 놓았는데, 그게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었다. 당시에는 작은 홍보서 (红宝书 : 문화혁명 기간 중 모택동의 어록이나 선집) 외에는 가르치는 게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밖의 아무것도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교실 창문으로 보면 사방에 들판이 보였다.

나는 보았다. 봄에는 심어놓은 벼가 자라날 때, 들판이 평평해지는 것을.

한여름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면 파란 들판에는 길고 긴 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가을이 깊어지면, 맑고 상쾌한 새벽, 오리들이 절반은 밭두렁에 남아있고 절반은 논에 떠 있을 때의 쓸쓸함을,

거기다 겨울철 숲과 들판은 봄의 화려한 화장과 여름의 무성함을 벗어버렸는데, 오직 흰 목 까마귀가  갈색 진흙 더미에 남아 폴짝폴짝 뛰면서 소박하고 수수한 모습을 보여주던 것을.

 

아천에는 촌사람들의 속어가 하나 있다. 어떤 사람이 매우 게으른 것을 묘사할 때, "게으르기가 구운 뱀이라도 먹겠네"라고 한다. 무엇 때문에 사람이 게으르면 구운 벰을 먹는지 혹은 먹지 않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말의 의미는 분명해서 따지지 않아도 된다.

어느 날 오후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 마침 시골 이웃들이 밭에서 돌아와 쉬는 모양인지 소란스러웠다. 역시 시골 속어로 말하면서 "어린 소를 먹는다"라고 했다. 나는 돌계단을 걸어가던 참인데 멀리서 장모가 이웃 사람들과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게을러, 정말 게을러! 잠시라도 틈이 나면 바로 이층에 들어 누우러 가는데, 게으르기가 구운 뱀을 먹을 정도야."

 

장모의 이 말은 당연히 나를 욕하는 말이다. 장모가 보기에는 내가 쓸모없고 게으른 사람이라 하고 있는 일도 역시 쓸데없는 일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그럼 무엇이 부지런한 일인가? 나는 장모가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다른 집 사위를 칭찬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는 내가 막 와서 먹고 살 일을 찾다가 겨우 일을 잡았던 때였다.

장모가 보기에는 근면의 정의는 바로 육체노동을 가리키며 육체노동 외에는 일체의 노동도 포함되지 않는다.  장모가 나를 질책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지식 분자를 질책하는 것과 같았다. '문화혁명" 기간에 지식 분자란 한 무리의 사지(四肢)를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고, 오곡도 구분 못하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그래서 교육은 생산노동과 서로 결합해야만 하고 지식 분자는 공장과 농촌에 가서 생산노동에 참여해야 했다.  학교 안에서도 공장과 농장 일을 해야만 했고, 공(工)과 농(農)을 가르쳐야 했다. 내가 장모 집에 간 그날 이후 벌써 체득했던 일의 발원과 흘러온 내력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