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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필, 단편소설

6, 세월이 해결해 준다(日子是一种了却) - 何士光

 

서쪽으로 기우는 햇볕이 정면으로 돌계단을 비췄다. 마당에는 장작과 건초 태우는 연기가 날려 흩어졌다.

나는 조용히 걸어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껏 장모가 내 욕을 한 것을 못 들은 척하고 거기다 아무 표시도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변명이라도 했다가는 장모 마음속의 원망과 분노가 불에 기름을 부은 듯, 더욱 격하게 타오를 것이다. 만약 그랬다가는 장모는 다른 집 사위를 모범으로 치켜 새우는데 그치지 않고, 나를 쥐구멍이라도 찾게 만들 것이다.

거기다 수저라도 큰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가는 나를 마땅치 않게 보고 고개를 돌려버리고, 이어서 며칠간은 지속될 것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나를 낭비하면 안된다. 나는 이미 시간이 긴박함을 느꼈다. 

장모는 경사진 땅을 팔 때처럼 혹은 한바탕 가정의 "문화 대혁명"을 일으킨 것처럼 그녀가 가진 모든 시간과 정력을 다해서 나에 대한 투쟁을 철저히 진행할 것이다. 우리들의 세상살이와 생활은 우리 가정의 구성과 격식에 따라 다르게 전개된다. 우리의 갈등, 충돌, 투쟁도 역시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처마 밑 집집마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전개된다. 이것이 사람들이 통상 말하는 내부 투쟁 혹은 둥지 투쟁이라고 하는 것인데 우리는 이러한 분쟁 중에 지혜 외 역량과 열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흩어져 사라지게도 한다.

만일 장모가 시선을 내 신상에 돌리지 않았더라도 장모는 아마 다른 곳에는 돌릴 데가 없었을 것이다.

내 스스로 노력하여 장모와 장단을 잘 맞춘다 하더라도 그녀 마음 가득한 원망과 외로움으로 인하며 아무리 노력해도 일이 잘 되었을 리 없다.

그래서 장모는 그런 식으로 자기의 시간을  고집스럽게 지탱해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이층 방에 숨어서 내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뿐이었다.


아래층에서 말하는 소리가 작아졌다. 당연히 이웃사람들이 장모에게 그들이 방금 말한 것을 아마 내가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말소리가 잠깐 끊겼는데, 다시 장모가 한마디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가 겁나? 내가 한마디 하겠어. 자고로 어른들 말이 관(官)이 아무리 횡포해도 어쩔 수 없고 부모가 아무리 횡포해도 어쩔 수 없는거라 했어."
늘 하는 말이 아니던가? 听君一席话,胜读十年书 (당신과의 대화는 내가 십년 공부한 것보다 낫다)라는 말을.
나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내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등의자에 앉아 장모의 말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하고 다정함을 느꼈다. 장모의 이 한마디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서적을 뛰어넘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우리의 역사도 뛰어넘었다. 즉 우리의 "무산계급 문화 대혁명"의 역사를 보자.  어떤 사람이 날마다 말하고 사실을 나열하고 도리를 말해 주겠는가? 강의하고 대변론을 한다고 하지만, 과연 어느 누구가 우리에게 가르쳐 보여 주겠는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도리를 말해 주겠는가? 오히려 그보다 못한 장모가 진실을 보았다. 관(官)은 부모요 민(民)은 자식이니 그녀가 만약 횡포를 부린다고 해도 나는 어쩔 방법이 없다. 어떤 후과가 있더라도 어떤 책임도 질 필요가 없다. 나는 바로 이 말에 번쩍 깨닫고 장모 면전에서 모르는 척하고, 말도 많이 하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장모 스스로 상처 입게 장모를 오도(误导) 하지 않고, 나 스스로도 자책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사실, 그 기간은 내가 내 일생 중에 부지런했다고 할 건 없지만, 정말 제일 바빴던 시간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딸이 태어났고 이상하게 꽤 많은 일이 일어났다. 딸은 1971년  출생했는데 음력 2월 19일 태어났다. 그날은 전설에 나오는 관음보살의 생일이기도 하다. 딸은 장작불로 구운 회흑색 기와지붕 아래에서 태어났다.

딸이 태어날 때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나는 40킬로 떨어진 현성에 있는 반쯤 산에 걸쳐있는 중학교에서 혁명의 이름으로 동지들에게 비판을 받고 있었다.
내가 3일후 돌아와 딸을 보니 아이는 연약하게 자리에 누워있었다. 시국이 암담하여 앞날이 어찌 될지 전혀 보이지 않았을 때인데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이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깊은 감동과 함께 '나는 아이에게 영원한 죄인이다'라고  느끼지 않을 수없었다. 한줄기 깊고 무거운 슬픔이 나의 마음을 단단히 압박했다. 

사람이 부친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통상 일종의 엄숙하면서도 기쁜 의미를 포함하고있다. 하지만 행복했었는지 불행했었는지? 지금까지도 계속 그런 심경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때 이후, 나는 언제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내가 인간세상으로 데려온 고생스러운 생명을 주시하고 있다.

 

나중에 나는 이런 생각을 한편의 수필에 썼다. 거기서 나는 부친은 자녀에 대해 책임만 있을 뿐 권리는 없다고 썼다.
그때 나는 알았다. 내가 다시 인간 세상에 온다면 당연히 전생과 같을 수는 없을 테고, 어느 때는 훨씬 고집을 부리고 어느 때는 어쩔 수 없이 일보 후퇴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직 외동딸 하나만 두었는데, 이건 다른 사람들이 그러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결청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