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1일.
닷새간의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래킹을 마치고, 일정 마지막 마을인 촘롱에 도착했다.
어제는 새벽 MBC(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를 출발, 오전에 ABC에 올라갔다 내려와 히말라야 롯지에서 잤고, 오늘도 또 계속 8시간을 걸어 시누아 마을을 지나, 마지막 마을인 여기까지 왔다.
당연히 피곤할 만도 한데, 무사히 첫 일정을 마친 안도감에 피곤한 줄 몰랐다.
힘든 일은 일단 끝났으니 오늘은 시원한 구르카 맥주나 먹고 자면 된다.
거기다 내일 일정은 그냥 포카라에 가서 노는 것 뿐이다.
그걸로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은 100% 완비되었다.
마라톤을 뛰다 보면, 힘들고 지칠 때, 뛰지 않고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거기다, 걷다가 잠깐 서면 행복감은 배가 되고, 한술 더 떠서 아무 데나 주저앉기까지 한다면 그 자리가 바로 천국이 된다.
여기 촘롱이 바로 그 자리인 것이다.
히말라야에는 TV도 없고, 궁금한 뉴스도 없다.
먹고, 마시고 나면 그저 자는 것 외에는 아무 할 일도 없다.
그 잠은 피곤함과 만족감이 절묘하게 조화된 지극히 행복한 잠이다.
새벽 3시. 오줌이 마려워 잠이 깼다.
일어나 밖으로 나오니 공기는 차갑고, 온 세상이 적막하기만 하다.
여기는 촘롱 마을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숙소라 마을이 다 내려다 보인다.
멀리 노란빛이 몇 개 보였다.
처음에는 별빛인 줄 알았으나, 자세히 보니 높은 거봉들 중간에 있는 작은 마을들에서 켜놓은 호롱불 같은 등불이다.
말방울 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왔다. 가까운 곳에 있는 짐 싣는 말을 가둬놓은 공터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문득, 한국에 있을 식구들과 친지들이 떠오른다. 그들의 삶과 어떤 어떤 상황들이 떠오른다.
모두 먼 나라 이야기 같다. 현실감이라곤 도무지 없는 생각들이 지나간다.
모두 꿈이다.
이 꿈에서 깨어나면 나는 또 어디를 헤매고 있을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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