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몽골리안 아들이라 불렀던, 도조는 우리가 랑탕 히말을 갈 때 데려갔던 포터 중 하나다.
랑탕 히말을 갈 때, 우리는 산악 가이드 유보와 포터, 도조와 나렌, 이렇게 셋을 썼는데, 가이드 유보는 산악 안내만 하고 짐은 지지 않는 전문 가이드로 영어를 잘했고, 포터인 도조와 나렌은 짐만 지고 다니는 역할만 했으며, 기초적인 영어 외에는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그들의 일당은 가이드 미화 35불, 포터 20불이었다.
일반적으로, 가이드 포터를 데리고 산행을 할 때, 롯지에서는 비수기여서 그런지 모르지만, 방값은 거의 공짜 (방 하나에 우리 돈 3천 원)였다. 음식 값은 제대로 받았는데, 그 안에는 이들의 숙식비가 포함되어 있었다. 대개 롯지 주인은 이들의 숙박, 식사비를 따로 받지 않았고 등신객들에게 받는 돈에서 공짜로 이들의 숙박과 식사를 챙겨 주었고, 대신 가이드는 음식 서빙을 하거나 설거지를 하여 주인을 도와주는 식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네팔은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어, 이런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는 포터 일도 만만히 구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가 고용한 네팔 도우미는 가이드 유보 42세, 도조 32세, 라렌 20세로 셋이 나이차이가 십 년씩 났고, 세 사람 모두 남체바자르에서 온 고향 사람들이라 했다.
내가 도조를 몽골리안 아들이라고 부른 이유는 그가 내 아들이라 할 만큼 나와 얼굴이 비슷하게 생긴 몽골계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32살이나 되었고, 장가를 가서 아이가 둘 이라는데도 하는 행동은 늘 철부지 같기만 했다.
스무 살 먹은 라렌과 아크 똥을 가지고 배구를 하지 않나, 갑자기 주편의 높은 바위에 기어 올 라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나, 하여간 엉뚱한 짓을 하면서 즐거워했다.
나는 우리가 산행을 하다가 간식을 먹을 때면, "몽골리안 썬"하며 그를 불러 내 몫의 초콜릿, 양갱 같은 행동식을 나눠주곤 했다. 그러면 그는 대개는 먹지 않고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아마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 가져다주려는 거려니' 짐작했다.
포터들은 네팔 말밖에 모르니 의사소통이 될 리 없었다. 그저 먹을 것을 주면 웃거나 하는 것이 의사소통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래도 답답할 게 하나도 없었는데, 우리가 특별히 할 말도 없으려니와 영어를 잘하는 가이드 유보가 척척 알아서 이들에게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천부적으로 느낌 같은 게 있어서, 상대방이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 적의를 가지고 있는지는 말이 안 통해도 금세 알고, 서로 느끼는 감정은 교류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도조는 나를 잘 따랐다.
등산이 대층 끝나고, 강진곰파 마을 앞 넓은 계곡으로 피크닉을 갔을 때였다.
점심을 먹으려고 할 때, 일행 모두 적당한 돌을 찾아 앉았는데, 유독 나에게만 적당한 크기의 돌이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앉을만한 돌을 찾고 있는데, 나의 몽골리안 아들 도조가 어디선가 큰 나무토막을 가져다 내 앞에 턱 놓았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껄껄껄 웃었다.
아마 "내가 나무를 가져왔으니 거기 앉으세요"라는 뜻이겠거니.
이번에는 나도 하하하 웃었다. 그건 "고맙다. 수고했다"라는 뜻으로.
삭막한 히말라야에선 그 나무토막은 고급 소파에 해당 헜다.
피크닉을 마치고 강진곰파에 돌아오니, 시간이 일렀다.
나는 혼자 동네 구경을 나갔다.
우연히 나무토막을 많이 쌓아놓은 작은 집 앞을 지나는데, 안에서 갑자기 도조가 뛰어나왔다. 내가 들어가도 되는지 보디랭귀지로 물으니 그가 들어가자고 한다.
도조와 함께 안에 들어가 보니 좁은 공간에 포터인듯한 사람들 7~8명이 잠자리를 정리하고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요리를 하려는지 주전자 5~6개에서 물이 끓고 있었다.
도조가 그들에게 네팔 말로 내가 누구라고 설명하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이 내 한국 아버지"라고 설명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낯선 외국인으로 꽉 찬 공간에 혼자 들어가 있으면 섬뜩한 느낌이 들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도조가 옆에 있었으니까.
조금 있다가 나는 거기서 나왔다. 도조가 밖에까지 배웅을 해 주었다.
등산을 모두 마치고 카트만두에 왔다.
이제 도조와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우리 팀 대장이 인건비를 모두 계산해 주고 하루치 일당의 팁까지 준 다음, 나는 그에게 새 양말 한 켤레와 남은 초콜릿 전부, 그리고 500루피를 주면서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한국말을 알아들을 리 없지만 나는 큰소리로 말했다
"도조, 잘 가라.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 뭐!"
내가 말을 마치자, 그는 희로애락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없이 돌아 섰다.
마지막 인사말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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