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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필, 단편소설

우주의 중심(宇宙的中心) - 4 : 东君

 

향토를 경외하라 (敬畏乡土)

여러 해 전에, 나는 소설을 쓰는, 틈틈이《서향 이야기》라는 지리서를 쓴 적이 있다. 이 책은 그냥 심심풀이로 보는 책으로, 당연히 한가한 사람이 보는 책이다. 잡담과 한담이 쓰여 있고, 격식을 차리는 글은 별로 없다. 내 딴에는 이런 책이 사람들을 조용히 읽게 만들고, 손 가는 대로 뒤척이다 보면, 답답한 생각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옛 어떤 명사가 눈 내리는 밤 무료하게 있다가, 갑자기 옷을 걸치고 일어나, 작은 배를 한척 사서 친구를 찾아갔다. 그 집 문 앞에 다다르자, 갑자기 흥취가 사라져, 그대로 돌아와 잠을 잤다.

이 이야기는 대략 책을 읽는 사람의 하나의 속성으로 간주된다.

우리는 책을 읽을 때, 때때로 천성에 따르고, 자기가 배운 것을 활용하지는 않는다.

무료할 때 책을 읽는 것은 좋다. 그런데 무료한 가운데 재미를 찾는 것 또한 좋다.

이 책은 한차례 한담에서 비롯되었다.

때는 겨울, 몇몇 친구들이 농가의 작은 마당에 앉아서, 몇몇 지방의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를 했고, 이야기는 해 질 녘까지 계속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낙엽이 땅을 덮었고, 태양빛과 등나무가 하얀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분위기에 이끌려, 우리들의 이야기에는 조금은 순박한 생각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그 순간, 나는 갑자기 지방의 기록을 작은 책으로 한 권 써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몇 친구가 내 생각을 듣고, 그걸 꼭 써내라고 당부했다.

처음부터, 나는 감히 함부로 써 내려갈 수 없었다. 결국 글 솜씨 외에 무슨 주장이 있는 것이 아니고, 더더욱이 마음속에 생각해둔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한동안, 나는 지방 자료들을 한 아름 모아다, 책상 위, 사방에 늘어놓고, 생각나는 대로 사용했다. 휴지 더미에서 좋은 자료를 찾았을 때, 나는 그날의 등나무 고목의 정경을 몸으로 느꼈다.

날이 점점 쌓여감에 따라, 무언가 쓸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책이 되었다.

이 책은 낙청 서향(乐清 西乡:저장 성 온주시 동북 지역)의 범위를 넘지 않고, 사실 아주 작다. 나는 지리서 같은 것을 써본 적이 없었고, 서북지역에서 시작해서 동남지역까지 포함시킬 구상을 했다.

시간 상, 개벽 이래부터 쓰지는 않았다.

다만 몇 가지 지리서 집필 방법은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나는 지방 작은 지리서들을 몇권 읽어 보았는데, 문장 솜씨가 정말 훌륭했다.

어떤 지방에 대하여 쓰는 데, 사람마다 각기 다른 색깔과 소리가 있으니, 보는 사람이 자연스레 재미를 느끼게 된다.

나는 매번 서점을 돌아다닐 때마다, 이 방면의 책을 일이 있거나 없거나 뒤척여 본다. 이건 이미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지리서가, 여전히 어둡고 차가운 구석에서 하늘과 태양을 보지 못하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 채 있는지 모른다. 먼지 쌓인 책들은 사람들에게, 들판에서 살아가는 야생 식물을 떠오르게 한다. 나는 그것에서 민초의, 왕성한 생기가 살아있음을 믿는다.

좋은 지리서는 성경처럼 읽을 수 있다.

옛날, 부잣집 자제들은 성현의 글을 읽는 것 말고도, 언제나 어른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향토 문헌들을 많이 읽어라. 그건 성인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나 같다. 시를 쓰는 사람은 초목과 곤충, 물고기에 대해서 많이 알아야 한다."

우리가 글을 쓴다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고, "내" 주변 사물에서 시작된다. 내 주변의 사물을 제대로 모르면서 어떻게 자기를 안다고 하겠는가? 나는 향토를 경외(敬畏) 하면, 반드시 수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에 인물과 풍물과 각종 용구를 쓰는 데는, 관대하게 쓰거나, 혹은 편견을 가지고 쓰거나, 사심을 가지고 쓰거나, 때로는 웃으며 장난치고, 또는 화내며 욕하며 쓰거나, 하여간에 정해진 규칙은 없다. 실제로"공공을 이롭게 하거나 해를 끼치는 도구" 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필요하지 않다. 또 무슨 "스스로 분발하여 연마하는 효과'"가 있어야 한다고 할 수도 없다.

인물은 가장 쓰기 어렵다. 하지만 쓰다 보면 쉽게 상투적인 길로 들어서게 된다. 출생 사망 연월, 생애의 간략한 기술, 이런 것을 모두 써야 하고, 부고 같은 것도 읽어보아야 한다. 또 글이 조금 재미없고 싱겁다 싶으면 야사, 일화 같은 것을 넣어 볼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문인 묵객들은 글을 잘 쓰고, 평생 쓰기를 잘한다. 무릇 무언가 말하면 주목을 받고, 무언가 하기만 하면 칭송을 받기 때문에 그들의 일은 모두 기술된다.

화공, 지리, 물리, 생물, 의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들의 저작물이 주장하는 대부분이 지질, 매장 광물, 동물 화석, 동물 세포 등등 같은 것들이고, 그들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매우 적다. 그들에 대해 알기 쉽도록 잘 써주기를 바라지만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의 일생을 윤곽을 질 잡아 깔끔하게 쓴다 해도, 전혀 웅장한 맛은 없다.

또한 어떤 선인들은 도덕과 문장에서 이름을 날렸지만, 남아있는 글이 없고, 오랜 세월이 지나가다 보니, 지위와 명성이 모두 사라졌다. 나는 심지어 "신패명열(身败名裂 :지위도 명예도 모두 잃다)"이라는 단어는 결코 남을 비방하는 단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잔혹한 역사적 사실을 소명하는 말일뿐이다. 잘 알려진, 재주 있는 고승 지봉법사(芝峰法师)도 항주 낙청의 지리서 안에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을 뿐이다. 이것 외에는 그에 관한 상세한 사료를 나는 아직 구해서 읽어보지 못했다. 지봉이 별세한지 채 반세기가 채 넘지 않았지만, 그의 인생과 문장은 벌써 잊혔다. 과거 어떤 사람이 그의 흩어진 글과 글씨를 수집하려고 하였으나, 고생만 했지 손에 들어온 자료는 별로 없었고,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지봉의 예처럼, 우리가 요즘 쓰는 글이라 해도 어느 누가 변함없이 오래도록 남기리라 보증할 수 있겠는가?

글의 인연이란 세대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서로 만나게 하고 서로 알게 하는 것이다.

청대 시원부(施元孚) 선생의 책은 민간에 조각조각 흩어졌다. 하지만 그의 후손인 반계(半溪) 선생이 수집하여 다시 중간하였다. 여기서, 그는 어둠 속에서 일찌감치 기회와 인연을 마련한 것이다.

풍토에 관해 쓰는 것은 인물에 비해 훨씬 재미있다. 내가 쓴 것은 서향(西乡)의 풍토이다. 때로는 완전한 기록을 위해 계획을 벗어나기도 했지만, 역시 완전하게 기록하기는 어려웠다.

현(县), 서쪽이나 동쪽이나 모두 일맥상통하여, 동향(东乡)이나 서향(西乡)이니 풍속이 서로 비슷하고, 차이가 크지 않다. 기껏 서향 사람들이 "명당(明堂)이라고 하지만, 동향 사람은 "당명(堂明)이라고 하는 정도다. 비슷한 예로 3척 3촌 길이의 나무판을 모장 사람들은 "장등(长凳 긴 의자)"이라고 하지만, 소흥 성내 사람들은 "조등(条凳 길쭉한 의자)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책에 나열한 기물(器物)의 명칭은 아주 많은데, 만약 복잡하게 쓰게 되면, 한의사가 약 처방을 잘못 써서 병을 키우는 것 같은 결과를 면하기 어렵다. 때로는 서화를 너무 아끼다가, 어쩔 수 없이 버리기도 하였다.

풍토와 인정(人情)에 대해 쓰다 보면, 필연적으로 오랜 관행에 범위가 미친다. 줄줄이 장원(状元)을 하였다든가, 사람들이 모두 요순(尧舜 성인) 같다든가 한다. 나는 말한 것이 모두 같은 의미라고 생각했다. 보통 사람들 사이에도 물론 요순은 있고, 평범한 행동에서도 장원(일인자)은 있다. 장작을 패는 사람일지라도 일생 동안 나무를 패다 보면 사리분별이 생기고, 결국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된다.

이 책에서 나타난 사람들 중에는 이름도 성도 없는 사람들이 있다. 무명인이라도 속되지 않은 언행은, 역시 사람들을 숙연하게 하고 그를 존경하게 한다. 기술을 전수해 주는 사람은 잊힐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