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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필, 단편소설

우주의 중심(宇宙的中心) - 3 : 东君

 

타향이라는 관점(他乡的眼)

 

 

우리 집 문에서 좁은 골목을 지나, 서쪽으로 100미터쯤 걸어가면,

악취 나는 개천이 눈에 가로 걸쳐있다. 거기서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개천을 따라가면, 수양버들이 하늘하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안개라도 끼어 있으면, 모든 것이 흐리멍덩하지만, 그렇다고 경치가 나쁘지도 않다.

나는 자주 그곳을 지나갔다. 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다 겪어 보았지만, 나는 여태껏 무심히 경치를 보아왔다. 여기는 개천을 따라 수양버들을 심어놓은 것 빼고는 온통 인공 화단이다.

유명하고 진귀한 꽃은 누가 꺾어갈까 봐, 온통 값싸고, 기르기 쉬운 꽃만 길렀다. 그중 한 꽃밭의 빈터에는 몇 포기의 갓이 심어져 있었다. 아직 어리고 작기는 했지만, 싱싱한 짙은 녹색은, 늦 봄의 태양빛이 비치는 가운데, 이곳 토지의 따스함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고, 확연히 아름다웠다.

이 작은 토지는 비록 원림국(园林局) 소관이었으나 아직까지 누가 와서 채소를 기르지 못하게 막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느 날 새벽에, 내가 거기서 운동을 하는데, 채소를 재배하는 농민이 개를 데리고 와, 잠시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사람과 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줌을 갈겨서, 밭에 물을 주었다.

그들이 가고 나서, 나도 참지 못하고, 채소 밭에 오줌을 갈겼다.

보름 후, 여기를 지나다가, 몇 포기, 갓의 아름다움이 뜻밖에, 여러 꽃을 압도하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렇게 억지로 꾸민 인공 화단에 본래부터 반감을 갖고 있다. 여러 종류의 꽃이 가지런히 획일적으로 피어있어, 왁자지껄해 보이기는 하지만, 생기 넘치는 발랄함은 없다.

한 번은 내가 화단에서 멀지 않은 전신주 아래에서 사람을 기다리다가, 뜻밖에 버려진 법랑 찻주전자 속에서 한 포기, 관음총(观音葱)이 뿌리내린 것을 발견했다. 관음총은 녹색으로 충만하고 또 투명하기도 했다.

그때 도연명(陶渊明)의 유명한 시구가 떠올랐다 "숲에 있으면 몰랐을 테지만, 홀로 서있으니 모두들 그 진귀함을 안다" (원문: 连林人不觉, 独树众乃奇)

바로, 시(詩)와 하나의 마음으로 서로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사진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한순간의 아름다움을 찍지 못하고, 설령 글로 묘사한다 해도 어쩌면 기량이 미치지 못한다.

나는 후에 사진작가 진 루이씨우(金锐秀)의 사진 작품을 보게 되었고, 중요한 것은 촬영 기술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는 피사체를 발견하는데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느님은 사진작가를 편애하는지, 보다 많은 빛을 그들에게 내려 주었다. 이는 곧 그들에게 빛 가운데서, 빛을 증명하도록 한 것이다.---- 손에서 마음으로, 신비한 빛이 번쩍 빛나면, 아름다움이 바로 '"찰칵"소리 가운데서 탄생한다.

이것은 외부 세계에 세 비춰들어오는 빛과 마음속에서 분출되는 빛이 서로 약속이나 한 듯 하나로 합해진 결과이다.

세상은 평범하기 짝이 없지만, 나는 그 가운데서, 여전히 몇 포기의 갓 혹은 한줄기 파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감각은 소란스러운 속세와 멀리 떨어진, 산중에서 가장 잘 느낄 수 있다.

어느 때,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데, 한바탕 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하기가 차가운 샘물 같았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이 황량했다. 사람이 아무도 없고, 당연히 사람 말소리도 없었다. 한바탕 분 바람은, 마치 나 한사람 만을 위하여 불어준 것 같았다.

대자연은 이처럼, 이김 없이 주지만 나는 이 바람을 품 안에 싸안고 집으로 가져갈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산속에서 묵묵히 자연이 베풀어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소동파는 장회민과 밤중에 승천사를 거닐며 이렇게 말했다.

달이 밝지 않은 밤이라, 소나무 짖나 무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둘 같이, 한가한 사람들에게는 귀가 있다.

조각가 로댕의 말로 바꾼다면 바로 이렇다.

어디에도 아름다움은 없다. 하지만 그건 아름다움을 발견할 눈과 귀의 결핍일 뿐이다. 이런 눈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수시로, 생활 가운데서 혹은 대자연 안의 평범함 속에서 어느 한순간, 기이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세상 만물을, 우리는, 이미 그냥 훑어보았다.

아름다운 사물들은 여기 차기 있으면서 생성 또는 사멸해 가다가, 결국은 무상함을 안겨준다.

소위 고향에도, 사람과 구름은 이미 없어졌다.

어느 사람은 빛을 찾아가며 촬영하는 방식으로 고향 땅에 방치된 조각들을 찾는다. 그런 잔존한 옛 물건들, 아직은 시멘트로 덮이지 않은 도로, 그런 기후 풍토에서 묵묵히 노동하던 모습들은 하나의 비천하지만 은폐된 존재였다. 그것들이 돌연 한 줄기 빛으로 밝아졌다가, 이름 없이 사라진다.

진 루이씨우(金锐秀)는 감탄한다고 한다.

많은 아름다운 풍물들이 고향에서 하나하나 사라져 가고, 이 때문에 지금의 고향은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닌 것 같아졌다. 이것은, 렌즈로 획 대하여 감지한 한 개재의 존재가, 말로 하기 어려운, 마음 졸임과 숨겨진 아픔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패러독스가 생긴다.

우리는 원래 어떤 장면의 기억 중에서 천천히 사라져가는 고향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우리가 찾은 것은 오히려 낯선 "타향"이다.

우리는 계면쩍게 입을 연다. 이것이 우리 것, 우리 것, 우리 것이다.

맞다. 어느 날엔가, 우리는 아마 발견할 것이다.

과거에 우리에게 속했던 "우리 것"들, 그런 "우리 것"들은 더 이상 나에게 속하지 않는다.

나는 돌아갈 데가 없다. 오직 "타향"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