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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필, 단편소설

우주의 중심(宇宙的中心) - 1 : 东君

 

 

후투티 (적당한 새가 생각나지 않아 후투티를 그렸습니다)
 

 

새가 낮게 날 때, 공중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자동차의 소음에 묻혀서 사라져 버린다. 이 때문에 도시 상공을 날면서 우는 새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새들은 시끌벅적한 대지에서 멀리 떨어진, 끝없이 큰 하늘 위에서 독특하고 미묘한 소리를 내지만, 우리는 여전히 들을 수 없다.

사람과 새는 각자 다른 세계가 있고, 각자 다른 살아가는 법이 있다.

새들은 사람들이 보라고 나는 것이 아니며, 사람들이 들으라고 지저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전에 이런 사진 작품을 본 적이 있다.

새 한 마리가 어떤 사람 머리에 앉았는데, 사람과 새 모두 모습이 태연했다. 사람의 일부분이 바로 새인 것처럼, 새의 일부분이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새는 사람에 비교하면 나무와 훨씬 친하다.

왜냐하면, 신(神) 이 땅 위를 기어 다니는 짐승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를 창조했고, 새도 신의 뜻에 따라 한 구루 한 구루 대지와 하늘을 연결하는 나무 위에서 자기에게 알맞은 머물 곳을 찾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제일 적막한 나무가 있다면, 일 년 내내 새 한 마리 쉬러 오지 않는 나무일 것이다. 새가 오지 않는 나무는 배 한 척 없는 강이나 같다.

우리가 거주하는 도시에, 만약 새가 쉬러 오지 않는 나무가 있다면, 사람으로 말하자면, 이곳은 당연히 아무것도 그리워할 것이 없는 곳이나 같다.

사람이 시끄러운 인간 세상에서 바쁘게 뛰어다니다 보면, 휴식이 필요하고, 그래서 집이 생겨났다.

새들도 하늘을 날다 보면 앉아서 쉬어야 하고, 그래서 둥지가 생겨났다.

공중에는 새가 있고, 땅 위에는 인간이 있는데, 일종의 집이란 느낌은 천천히 생성되었다.

북경 어느 시인이 말하기를, 북경에 "니아오 차오(鸟巢: 새 둥지- 북경 올림픽 주경기장)"가 건설된 후 그는 아무 이유 없이 새 둥지가 당연히 시내의 이름이 된 것처럼 느꼈다고 했다. 그런데 새 둥지 혹은 새집은 당연히 시골의 이름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집은 동남해 곶에 있고 여기는 그야말로 시골인데, 거기서는 이제까지 새가 깃들이고 사는 곳을 새집이라고 부른다.

만약 어떤 사람이 새 집을 새 둥지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일관성 있다고 느낄 것이다. 방언을 연구하는 친구가 나에게 가르쳐주기를 새 둥지와 새 집은 옛날에는 확실한 구분이 있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공중에 있는 것을 새 집, 나무에 있는 것을 둥지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지역 사람들은 나무에 있는 둥지나 새 집이나 그냥 같이 부른다.

아직도 기억나는 나의 6~7세 때 이야기다.

동네 친구가 나와 몇몇 조무래기들에게 말하기를 자기네 집 뒷마당에 나무가 한 구루 있는데, 과실은 열리지 않지만, 새 알이 열린다고 했다. 우리들은 믿을 수 없어 가 보기로 했다. 나무 이래에서 올려다보고, 우리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알고 보니 새알 하나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지만, 어른이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나뭇가지에 걸려있었다. 다시 올려다보니 새 둥지는 이미 엎어져 있었고, 몇 조각 헝클어진 풀들이 바람 속에 파르르 흔들리고 있었다. 엎어진 둥지 아래, 어떻게 깨지지 않은 알이 있었을까? 이 새 알은 기적처럼 둥그런 모양을 보존하고 있어서, 마치 나뭇가지 사이에 괴실이 열린 것처럼 사람을 착각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꾸며댄들, 새 둥지야 어떻게 나무가 맺은 거대한 열매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