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 아는 사람들 중에는 완가(놀이를 즐기는 사람)가 적지 않다.
오조광은 "신동"이었다. 그가 20세 때 쓴 연극 《눈보라 치는 밤에 돌아온 사람》은 항전(抗戰)의 도시였던 충칭을 풍미했다. 그와 동시에 몇 군데 신문에 연재 글을 썼는데, 웃기게 말해서 "붓대를 놀려서" 기막힌 작품들을 썼다. 고희(70세)가 되던 해에는, 우시(无锡)에 취재를 갔는데, 그를 응접한 회사에서 그의 붓글씨를 보내달라는, 십여 명의 청원자 명단을 넘겨받았다. 그는 난처해져서, 나에게 수습해 달라고 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오 선생의 글씨는 1명 척(33 제곱 cm) 당 천元이라고 알렸다. 하지만 회답은 매우 빨랐다. "그렇게 합시다!" 나는 서둘러 말했다."미국 돈 천 원" 이번엔 그들이 난처해졌다. "하하, 어찌 그렇게나 많이 받으려고! 작게 몇 폭 써 주세요. 오 선생도 피곤할 테니."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고운 법, 그들은 포기하고, 값싼 혜산 흙 인형 뚱보를 선물했다.
왕증치의 희곡은 여러모로 잘 쓴 글이다. 《사자병(쑤저우성 유명 관광지)》에서 "두뇌 싸움"은 많은 사람 입에 오르내린, 구구절절 아름다운 글이다. 또 소설《수계(收戒 계를 받다)》는 대대로 전해질 작품이다.
그는 서예, 회화를 좋아했으며, 또한 미식가이기도 했다.
그의 글씨와 그림은 오직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 보내졌는데, 여관 여종업원들까지 그에게 달라붙어 작품을 요구했고, 객실에 서서 가다렸기 때문에, 나는 매일 밤 11시에 가서 그 여자들을 쫓아내야만 했다.
같이 동터우 현, 열도에 민요를 수집하러 갔을 때, 섬 여자 민병대원들은 모두 공장 직공이어서, 고분고분 말을 잘 들었다. 파마를 하고, 입술을 빨갛게 칠하고, 줄을 서서 훈련을 받았으며, 실탄 사격도 했는데 매우 보기 좋았다. 왕 선생은 격려의 글에 "오 척 총을 든 씩씩하고 늠름한, 아름다운 섬 여인들이 기꺼이 무장했다"라고 썼다.
여자 민병대, 중대장이 총을 가지고 오더니, "왕 선생님, 시범 사격 부탁합니다!"라고 하자, 이렇게 다재다능한 완가(玩家: 놀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사양했다.
"그러면, 지원군 노병께서 시범 사격해 주세요!"
나는 백 미터, 엎드려 쏴 자세로 여덟 번째 동그라미 세 개, 아홉 번째 동그라미 일곱 개를 맞혔다.
사격을 마치고, 나는 그에게, '선생님이 만약 총 쏘는 것을 배우셨다면 나는 틀림없이 선생님을 잡가(雜家: 여러 방면에 재주가 많은 사람)로 존경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관화(管桦)의 소설 《작은 영웅 우래》는 벌써 명성이 두루 알려졌다. 늘그막에 그는 서화를 좋아했는데, 특히 대(竹)를 잘 그렸다.
대는 "정직, 겸허, 절도"의 상징이고, 정반교(강희, 옹정 대의 대를 잘 그린 문인)의 대(竹)에 쓰여있는 "청산(靑山)은 소나무를 꽉 물고 놓아주지 않는구나. 본디 바위 틈에 뿌리내렸으니, 동서남북 어디서 오는 바람에라도"흔들리지 않네"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모두 인생의 정취를 추구하는 것이다.
관 선생이 대를 그린 지 20년, 오로지 이것만 좋아했으니, 역시 완가라 할 것이다.
여기자 곡란(曲蘭)은 컴퓨터 완가다.
아들이 대학에 떨어지고, 또 중전(중등전문학교 : 고졸 학력을 대상으로 2년제 실무교육을 하는 학교)에서 퇴학 당하자, 그녀는 아들에게 컴퓨터로 즐기는 것을 가르쳤다. 그녀의 보고문학《점수라는 중압에서 구출해낸 소년 영재》은 열렬한 반향을 일으켰다.
지금 그 귄두언에서 몇 구절 발췌한다.
"한 어머니가 아들의 두통거리인 학습 성적 때문에 이혼까지 하게 되었다. 이혼의 아픔은 그녀를 전심전력을 다하여 아들을 가르치게 만들었다. 그녀는 온종일 아들이 숙제 하도록 독촉했고, 아낌없이 돈을 들여 아들에게 각종 공부 자료를 사주었고, 가정교사를 들였다.
모자 두 사람이,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완전히 지쳐 있을 때, 아들이 겨우 붙은 중전에서 퇴학 당했다.
도저히 어찌해볼 방법이 없자, 모친은 아들에게 컴퓨터 즐기기를 가르쳤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인터넷 기초 숫자화 교육은 아들에게 하늘 높이 비약할 날개를 달아주었다.
겨우 18세의 아들은 마이크로소프트 사가 인증한 시험 중, 최고 난이도의 두 가지 국제 고시를 통과했고, 일약 아시아 최연소 데이터 베이스 전문가가 되었다. 그리고 뜻밖에 대학 강단에서 강의까지 하게 되었다.
옛날 사람도 완가가 적지 않다.
"쌀 다섯 발 때문에 허리를 굽히지 않겠다(원문: 不为五斗米折腰)"
도연명(陶渊明)은 관가의 부패함을 혐오한 나머지 현령에 임명된 지, 몇 달 안되어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와 농사와 면학의 일생을 보냈다. 그는 시가《귀거래사》에 이렇게 썼다.
집으로 돌아가, 시끌벅적한 속세와 괸계를 끊자.
세속과 내가 바라는 것은 서로 어긋나니, 더 미련을 가질 필요가 뭐 있겠는가?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누리는 단란함 속에, 한가할 때 책을 읽고, 거문고를 타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국화꽃을 꺾어들고, 동쪽 울타리 아래서 유유히 남산을 바라본다"
그의 이런 즐거움은, 봉건사회의 "은둔자"도 자기만의 세상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제갈량은 대(大) 완가라 부를만하다.
"초선차전( 草船借箭)"은 짙은 안개가 낀 쇄강에서 한밤중에 적의 진영으로 들어가면,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질 것을 뻔히 알고, 웃으며 얘기하다가 십만 개의 화살을 가져오겠다고 한 것에서 비롯된다. 조조와 주랑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동풍을 빌 리다(借东风)"는 바람이 있든 없든, 모두 피할 수 없던,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는 주유의 칼과 도끼를, 제단에 올라 적벽을 불태움으로써, 막아내고, 손권과 유비의 동맹을 굳게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공성계 (空城计)"는 제갈량이 유일하게, 일생일대의 신중을 기한 사건이었다. 성문을 잠그지 않은 채, 위험을 무릅쓰고, 성 꼭대기에 앉아 악기를 연주함으로써, 내막을 알리 없는, 사마의가 놀라서 십만 대병을 뒤로 후퇴시키도록 만들었다.
나관중의 신들린 필치가 제갈량의 모험가적 기백과 지혜를 재미있게 이끌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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