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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필, 단편소설

부친 일생의 6개 기막힌 장면(父亲一生的六个别致场景) -3 : 千岛

1971년 1월 22일. 31세.

꼭두새벽에, 그와 같은 방, 학교 진구는 짐을 꾸리느라 정신없었다. 외투를 입으려니 거치적 거려서, 그는 아예 벗어서, 행여 옷이 찢어져 구멍이라도 뚫릴까 겁내며, 조심조심 회백색 벽의 쇠못에 걸었다.
이 초록색 군복 외투는 그와 더불어 10년을 견뎌왔고, 그의 3년간 군대생활의 상징적 물건이라, 그는 극도로 아꼈다.

비록 이미 낡아빠져서, 서너 군데 헝겊 조각을 대고 기웠지만, 매년 겨울만 되면 그는 언제나 궤짝을 뒤집어 그 옷을 찾아 입었다. 맑은 날에는 햇볕을 충분히 쬐인 후, 껴입었다. 그것을 입으면 따뜻한 온기뿐만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은, 갑자기 마음속에 저르르 용맹한 기개가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전에 군인이었다는 생각이 미치자, 기분 좋기도 했고 동시에 씁쓸하기도 했다.

주산(舟山) 포병부대에서 그는 정찰병이었다.대다수의 전우들이 언 땅에 온들을 파느라 고생하는 것에 비해서, 그는 여러 섬을 바쁘게 돌아다녔으니 남보다 쉬운 펀이었지만, 그래도 피곤했다. 그는 마음 한구석에 직업군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군 생활 중, 유일하게 한번 고향에 부모를 찾아보러 갔을 때, 늙은 모친이 아들 생각을 간절히 하는 것을 보았다. 또 자기 시력이 점점 나빠진다는 사실과 모든 선행 가운데 효가 으뜸이다(百善孝为先)라는 말을 신봉한 그였기에 군을 제대하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당연히 그의 상의 주머니 안에는 3년간 고이 간직한 수첩이 들어있었고, 그와 더불어 때때로 떠올랐던 그녀도 있었다. 이것 역시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하나의 유인(诱因)이 되었다.

그는 어깨에 메고, 등에 지고 온 짐들을 선창에 밀어넣고나서, 긴 한숨을 쓸어내렸다.

강은 콸콸 소리 내며, 배 뒤편으로 흘러갔다. 그가 뱃전에 기대어 섰을 때, 눈앞에 전개되는 풍경은 그에게 남조 문학가 오균(吴均)의 시를 떠오르게 했다. "风烟俱净,天山共色 (직역: 바람이 불어 연기가 흩어져 깨끗해지니, 하늘과 산이 같은 빛갈이네 - 詩意는 부귀공명을 좇다가 절경을 바라보니 마음이 평온해진다 라는 뜻이라고 함)", "从流飘荡,任意东西(물결 따라 정처 없이, 동쪽, 서쪽으로 제멋대로 흘러 가는구나 )
1450년 전, 오균(吴均)도 바로 이 강 줄기에서 절경을 보았다.
글은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 그는 옛 시인을 추억하며 오늘의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는 밤 낮으로 부모 형제, 누나 동생들과 서로 의지할 수 있었지만, 꿈속의 그녀는 결국 하나의 환영(幻影)이 되어버렸다.
그가 고향로 온 후, 그는 학생, 군인의 신분이었던, 그의 청춘의 역사를 써 내려갔고, 거기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는 시작한 곳으로 다시 돌아왔고, 다시 원래대로 농민이 되었다.
그는 경작지에서,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었다.
이러기를 4년, 우연한 기회에, 그는 민반교사(民办教师: 민영학교 교사)가 되었고, 시골 소학교에서 6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
운명은 절묘하게 진행되었다. 그는 강남 57간부학교(모택동의 57지시에 따라 창립된 간부 교육기관)에 단기 사범 학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학교는 군사화 관리를 실행해서, 외부에 연락할 길이 없는, 전부 봉쇄된 학습이 이루어졌다.
이제 그는 제대로 학업을 마친 졸업생이 되었으며, 공반교사(公办教师: 법적으로 인가받은 공립학교의 교사)가 되었고, 호구도 농업 호구에서 비농업 호구로 바뀌었다.
삼십 세에는 스스로 서야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는 비록 삼십세에서 일 년 늦었지만 결국 꿈을 이룬 것이다.

그 당시에는, 거민호구는 농업 호구에 비해서 실질 가치가 훨씬 높았다. 이것은 중국 토지 제도상, 엄연한 현실이었다.
물고기는 용문(등용문)에서 튀어올라야하고, 사람은 농문(农门)에서 튀어 올라야 한다. 그것은 한세대, 또 한세대 이어져 오는 농민의 오랜 꿈이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한번에 꿈을 실현시키는데, 하필 그가 간 길은 남들이 가는 길이 아니었다.
그는 17세에 일차 튀어 올라, 그해에 중점(重点) 중학교 시험에 붙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이 호구(户口)를 바꾸고 장학금과 양표(식량배급표)를 받게 한 것이다.
어둠과 밝음이 뒤섞인, 어찌될지 모르는 시대에, 군대는 그의 인생에 오르막 길을 제공해주지 않았다. 군복을 벗고 농토로 돌아왔으니 결국 튀어 올랐다가 그냥 돌아온 게 아니고 뭔가?
그해에 만약 배움의 길로 계속 나가서, 대학에 들어갔다면, 현재 어떤 광경이 벌어졌을까? 그것은 알 수없다.
충분히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배에 올라 쓸어내린 한숨은, 어찌해야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나 하는 한숨인데, 이것은 그 후 10년 동안 숨 막혔던 한숨이라 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