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막상 발행을 준비할 있을 때, 나는 상당히 머뭇거렸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진충실 선생에게 다시 일부 내용을 보강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던 것이다.
황량한 황토 벌판, 시골 초라한 무대 아래, 그 스스로 한 명의 고향 보통 관중으로서, 농민 예술가들의 짙은 향토색으로 충만한 연기를 보면서 그가 현장에서 느낀 감정은 어떠했을까? 만약 약간의 글자만 늘려주어도 우리는 제대로 된 페이지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강한 분위기가 살아나고, 웅장한 효과가 날 텐데....
하지만 나는 정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감히 그런 말을 꺼낼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상당히 분수에 맞지 않는 요구였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진충실 선생이 어떻게 허락해 주셨는가?
또 중국 문단의 거장이 심혈을 기울여 써준 원고인데 당신이 다시 어떤 요구를 한다면, 무례한 짓이 아닐까?
그렇게 큰 거물이 아닌, 보통 중소 작가라 해도 매우 기분 나쁠 것이고, 표정이 굳어져 말할 것이다. "그럼 출판하지 맙시다, 다른 출판사에 보낼게요!"
이렇게 버럭 화를 낸다면, 어찌 편집이고 뭐고 할 게 있을 것인가?
꽤 여러 날이 지나도록, 나는 갈등을 계속했다. 한 사람의 직업 편집자로서, 나 역시 심혈을 기울여 문화면을 편집하는 미련한(?) 사람이었다. 비록 다른 사람 눈에는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며, 벼슬이 높아져 돈을 벌지도 못하는 신문 지면일 뿐인데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야말로 별로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로지 100 퍼센트 만족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완벽주의 성격이었고, 이 성격 때문에 나는 여러 차례 고생을 겪기도 했다. 이 일 역시 나로서는 속 마음으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고비였다.
나는 당시, 젊은 편집인 조여(赵玙)와 이일을 상의했다. 그는 내 생각이 맞다고 하면서도 진충실 선생에게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할지 염려된다고 하였다.
나는 결국, 전화를 걸기로 결심했는데,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1990년, < 백록원 > 이 출판된 후, 진충실 선생은 인민 문학 출판사의 처우가 매우 열악한 것을 보고, 자기 주머니에서 2만元을 꺼내어 편집인들의 처우를 개선시키기 위해 출연금을 냈다.
당시 2만 원은 매우 큰돈이었다. 오늘날 10만이나 20만(우리 돈 3천만 원 해당) 정도였다. 나중에 2012년 5월, 그는 또 주동적으로 백록원의 세 사람 책임 편집인 중 한 명이며, < 당대(当代) >의 주 편집인인 하계치(何啓治) 선생과 상의하여 "문학 편집인 상"을 설립했다. 진충실 개인이 몇십만 원의 큰돈을 내는 것을 보고 하계 치는 상의 이름을 "진충실 현대문학 편집상"이라 하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진충실 선생은 단호하게 거절히였고, 자기 의견을 고집하여 "백록 현대문학 편집상"이라 하자고 했다.(필자가 대신 말하자면 나중에 2013년 3월 20일, 회의에 거의 참가하지 않았던 진충실 선생은 특별히 북경까지 직접 가서 시상식에 참석했다. < 백록원 >의 세 사람의 책임 편집인인 하계치, 고현군(작고), 류 회군이 표창과 포상을 진행했는데, 이밖에 기타 좋은 책을 편집 출판한 수십 명의 편집인들에게도 포상을 진행했다).
작가가 자기 스스로 주머니를 털어 편집인 상을 만든 것은 중국 문단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척박한 섬서 성 작가들에게 하나의 감동적인 쾌거였을 뿐 아니라 전국의 다른 부유한 지역의 특별히 돈 많은 작가들로서도 이제까지 듣지 못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 이 일은 전국 문단과 특별히 섬서 성 작가들 안에서 커다란 물결을 불러일으켰다. 아마 섬서가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이제까지 섬서 문인들은 "짠돌이" (인색하다)로 소문이 났다. 섬서성 작가들은 오직 집에 무어라도 갖다 놓을 줄만 알지, 돈을 꺼내기란 아주 어렵다고 했다. 진충실 선생은 정말 호방하기가 과분하였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그가 문학 편집인들을 존중하고 아낀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상상하던 것과 완전 똑같이, 진충실 선생은 조용히 내가 전화하는 것을 다 듣고 나서 그의 고상한 인격으로 간결하고 기품 있게 글자 하나 문장한 줄을 진지하게 말했다.
"좋아요. 그럼 내가 다시 그 대목을 보완해서 보낼게요."
당시 나는 코끝이 시큰거렸다. 마치 지금 내가 일단의 추억을 문자로 쓰는 것처럼, 코는 다시 시큰거렸고, 눈동자는 또 축축해졌다.
며칠이 지나서, 나는 지난번과 똑 같이 진충실 선생의 속달우편을 받았다. 안에는 전처럼 얇은 백지가 두장 들어있었고, 여전히 가지런히 꽉 찬 글자들의 행간에 대작가의 글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진충실 선생이 보충해준, 노강 공연 현장에서 느낀 부분은 다음과 같다.
" 나는 이 연극 부분에 깊이 몰입하며 회상에 빠졌다. 이것은 웅혼한 관중(关中:산시 성 위수 유역 일대)의 대지 깊은 곳의 소리 또는 위수에서 들려오는 물결, 파도소리다. 마치 소나기가 끝없이 가을 벼에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 같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단비가 내려 윤택해진 진천(秦川), 초봄에 파랗게 싹이 난 보리 모종의 미세하고 없는 것같이 보이는 부드러운 소리, 심지어 나에게 장작 연기 자욱한 시골 골목을 떠올리게 하는, 소가 음메~ 말이 힝힝 우는 소리....
" 아, 얼마나 구체적이고,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뛰어난 문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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