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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필, 단편소설

때늦은 각성 ; 迟到的觉醒 (二) : 1/4 向迅

몇 달이 지난 후, 나는 결국 큰 결단을 내렸다. 내 청춘을 황폐하게 사라지게 하고,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던 그 도시를 떠나, 나는 서둘러 현재 살고 있는 이곳 북방  작은 도시에 왔다.

이 작은 도시는 공교롭게도, 역사상 배수의 진을 치는 거사를 하여, 지금끼지도 후세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절세 영웅의 고향이다. 내가 뜨내기 상활을 하던 작은 구역에서 그가 살았던 집까지는 몇 정거장 거리밖에 안되었다. 두 달 전, 나는 그가 살았던 집 앞을 배회한 적이 있는데, 결국 안에 들어가 참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를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다. "패배했지만 영광스럽다(虽败犹荣)"이 네 글자로 그의 인생을 결말짓는다면, 대체로 타당하다.

그를 생각해보면, 그는 시국의 변화를 보고 개탄하다가 종종 일을 망쳤다. 하지만 나는 이 대영웅(大英雄)을 위하여 조금 애석해하는 것 이외에는, 그를 생각한 적이 없다. 
나는  이 작은 도시를 실제 좋아한다. 이 작은 도시는 온통 소나무, 잣나무와 모감주 나무만 심어져 있었다. 이곳은 조용하고, 소박하고, 물욕이 없으며, 등을 밝혀 독서하기, 먹을 갈아 글씨를 쓰기, 천성을 함양하여 몸과 마음을 다스리기에 딱 어울린다. 실제 이렇다 보니, 나는 이곳에서, 방에 깊이 틀어박혀, 외출도 거의 안 하고 지냈다. 이것은 거의 내가 이상(理想)적이라고 생각하는 생활에 가까웠다.

두달이 지나자, 친한 친구가 증인을 선 가운데, 혼담이 오고 갈 나이가 꾁 찬 여자 친구에게 공을 들였고 결말을 보았다. 결혼이라는 일생일대의 큰일을  원만히 해결한 것이다. 우리는 이 나라의 한쪽 구석에서, 안빈낙도(安贫乐道)하며 살았고, 생활은 나날이 안정되었다. --- 세속의 티끌이 가라앉는 것 같이.

"나는 발생한 모든 것을 잊었다." 이것은 도리스•레싱이 < 생존자의 회고록 >에서 묘사한 '그 중년부인이 이튿날 그녀가 빙글빙글 도는 푸른 연기 속을 뚫고 담장 너머 보았던  담장 후면의 집'과 같은 것이다. 나도 그때  맞았던 한 달을 잊었다.
"나는 일상생활 중의 그런 자질부레한 일을 계속하면서, 비록 담장 바깥에 또 다른 생활이 있다는 것을 의식했지만, 내가 이미 그곳을 경험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때 망연자실했던 것이, 처마 밑  그림자처럼, 찬란한 햇살이  잠시 왔다가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날들은 결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  혹시 새로운 생활로 나의 주의력이 옮겨갔는지 모르지만.
하지만 나는, 놀랍게도, 여전히 망연자실이 그림자처럼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게다가 5월, 그때의 망연자실에 비하여,  이 망연자실은 확실히 심오하고, 은밀했기 때문에 알아차리기 쉽지 않았다.

확실히 그렇다. 내가 매시 매초, 그것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우연히 밤이 깊어, 조용해 졌을 때 혹은  내가 소설을 읽다가 내 신세가 연상되어 깊은 생각에 빠졌을 때, 그것은 그제야 내  머릿속에 잠시 왔다가 바로 사라지는 상념처럼, 번쩍 왔다가 지나갔다. 그것은 뜻밖에 번쩍 나타나 내가 양미간을 찌푸리게 만들고, 심지어 마음속으로 잠깐 긴장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르는 것 같더니 순간적으로 잊어버렸다.

이런 상황은, 바로 우리가 깊은 수면상태에 있을 때, 신제내부의 어떤 곳에서 갑자기 저도 모르게 경련을 일으키고, 그 순간  땅바닥에 넘어뜨릴 것 같거나  혹은 심연에 빠질 것처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문제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고,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지 깊이 연구해 보지도 않았다.

그것이 조금만 방심해도 그냥 사라져 버리다 보니, 나는 그것의 얼굴을 분명하게 볼 수 없고, 그 표정안에서 무슨 힌트를 잡아내려는 시도도 해보지 못한다. 오직, 직관이 나에게  말한다. 그것은 얼굴을 찌푸렸고,  걱정이 있는 것처럼 뺨을 실룩거렸다. 나로서는, 그것은 하나의 종잡을 수 없는 일, 하나의 은유이다. 비록 그것이 이처럼 만질 수 없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지만, 나는 그것이 그림자처럼 여전히 나를 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또 어떤 망연자실일까? 그것이 존재한지 오래되었나? 어째서 이제야 나타났을까? 나는 그것의 문제의 성질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나? 또 그것이 나에게 다져다 준 은밀한 괴롭힘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이 5윌의 그 헛되히 시간을 보내면서 오래 끌던 망연자실의 연장이거나, 그것이 다르게 변한 것이라면, 그것은 한 가족, 한 과목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은 더 이상 생존문제가 걸린 걱정거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정신생활의 공허에서  기인된 것도 결코 아니다.

이것은 정말 당혹스럽다. 곧바로, 어느날 나는 < 백 년 동안의 고독 > 중에서 읽었다. 인디언  비시타시옹은 어느 날 밤, 레베카가 흔들의자에서 손가락을 빠는데, 두 눈이 고양이 눈처럼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뿜는 것을 보았다. 그는 깊은 공포를 느끼며, 그녀가 숙명적으로 비참하고 고통스러움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 그는 문득  모든 것을 깨달았다. 이런 망연자실함은 결코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것이다.

나는 이런 숙명적인 망연자실함을 느껴서 알고있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자면, 비시타시옹은 역병을 운명이라 알고 단념했다. 체념하든 안 하든 본질상 별로 차이가 없을 테니.
"설령 아주 먼데까지 도망치더라도, 이 치명적인 역병은 끝까지 따라와 내가 가는 데까지 간다."
그래 보았자, 그것이 나에게 준 것은, 공포가 아니요, 일종의 갈등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