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자는 황성(皇城)에서 부터 전력을 다하여 속죄하면서, 이리를 향해 앞으로 나아갔고, 길은 정말 너무 멀었다. 그야말로 "팔 천리 길의 구름과 달"이리고 할만했다. 가는 길 내내 풍찬노숙(風餐露宿:길거리에 나앉았다는 뜻)을 해야 했는데, 의사도 없고 약도 별로 없었으니, 그야말로 생사를 운에 맡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옛날에는 양관( 阳关)을 떠난다는 것은 바로 세상과 떨어진 곤궁하고 황량한 땅으로 진입한다는 의미였고, 천리 고비사막은 사람의 흔적이 없는 "귀문관(鬼门关: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당나라 사람 왕유(王維)는 위하(渭河) 북안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친구 원이(元二)가 서역에 사신으로 떠나는 것을 환송하며, 탄식했다. "자네 한잔 주욱 들이키게, 양관 서쪽으로 가면 친구도 없을 터이니!"
이 한잔은 정으로 가득 따른 송별주였으며, 거기다, 한잔의 호탕하고 처량한 이별주였다.
손을 휘저어 신호하니, 이로부터 떠나간다.
무리를 떠나는 말이 소리쳐 운다.
이번 생에 혹시라도 다시 만나 술 한잔 할 수 있을까?
유배자는 모두 중죄인이다. 생존하는 상황이 걱정되니, 살아서 양관을 지나간다는 것 자체가 바로 기적이다.
천신만고 끝에 신강 경내에 들어서면, 천산산맥 북록은 유배자가 서쪽으로 나가고 동쪽에서 돌아오는 주요 노선이다. 동쪽은 바리쿤에서 시작는데, 그사이에 무러이(木垒) , 치타가(奇台), 지무 사얼, 푸캉, 우루무치, 창지, 후 투비, 마나스, 마소, 징허를 지나야, 마지막으로 이리(伊犁)에 다다른다.
바리쿤으로 말하면, 나와 정말 인연이 있다. 20여 년 전에, 바리쿤 현에 가서 글쓰기 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바리쿤은 실크로드 가운데 요충지로 지난날의 휘황 찬란했던 모습은 어디론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작은 도시로 쇠퇴해 버렸다. 문화 고적도 몇 가지 안되어 손으로 꼽을 정도다. 현지 문화국 친구는 유감스러워 하며 말했다. 역사책에 기재되어 있기를, 바리쿤은 상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부처님께 올리는 향과 초가 요란했으며, 각종 종교 사찰이 80 곳도 넘었다. 애석한 것은 "문화 대혁명" 때 네 곳의 옛 사찰이 파괴되어 산산조각 났고, 남아있는 것은 무너진 담벼락밖에 없다! 석양 무렵, 우리는 묵묵히 작은 도시의 쇠락한 거리를 걷는데 마음이 쓸쓸하고 무겁다.
바리쿤에서 이리까지는 1000km, 유배자는 걷거나 마차를 타야 했다. "거칠고 평평한 사막, 하늘이 노랗다."라는 황량한 고비사막은 "바람 부는대로 온 땅의 돌들이 함부로 굴러다닌다."는 광풍, 자연환경이 대단히 열악해서, 엄청나게 고생스러운 조건에서 장거리 도보여행을 해야 한다. 여기에 끝없는 학대와 모욕이 더해진다. 살아서 이리에 도착한다는 것은 정말 하느님의 보우하심에 감사해야 한다!
자기 차를 몰고 여행 하는 친구와 배낭여행을 했는데, 바리쿤 현청에서 이리까지 갔다. 평탄한 국도와 일급 고속도로를 차로 달린 주행거리가 1165km나 되었고, 걸린 시간이 21시간이나 되어 허리가 시큰 거리고 등이 아팠다. 하지만, 유배자의 비인간적인 상황을 생각하면 정말 감개무량했다.
유배자 중에는 당연히 나쁜 짓을하여, 법을 어긴 범죄자, 비적질을 한 악당, 살인강도가 드물지 않다. 하지만 많은 경우 나라의 기둥, 민족의 걸출한 인사들이 상소를 잘못 올렸다는 이유로 황제의 노여움을 사거나, 죄 없이 모함에 연루되어 액운을 맞은 경우도 많았다. 가슴속에,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가득했을 테지만, 속시원히 털어놓을 곳도 없었을 것이다.
유배 가는 도중, 기회를 엿보아 도망치는 경우도 빈번히 발생했다. 청조는 도망자에 대하여 조금도 어물쩡 대하지 않았다. 건륭 26년(1761년)교지를 내렸다. "앞으로 바리쿤 등 지역에서 도망자가 발생하면, 죄수의 원적 또는 죄수가 지나간 성(省)에서 수사하여 체포한다. 일단 심문 지를 옮겨야 하는 사유가 명백한 경우, 각 성의 제독 또는 순무가 자체 시행 후, 보고를 올려, 제 포한 곳에서 법의 준엄함을 대중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길은 끝없이 멀고, 수없이 많은 밤을 지내다보면, 유배자도 점차 이런 생활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들은 어쩌면 남몰래 경사스럽고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머리가 잘려 땅에 떨어진 사람 혹은 구족(九族)이 연루된 동료에 비하면 행운 이리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전에는 그들은 물이 흐르는 강남의 작은 다리에서 한가한 여유를 즐기거나 시를 읊고, 글을 짓고, 저서의 내용을 주장했을지 모른다. 사막 북쪽 서역에 가면, 강남 선비에게 보이는 것은 "넓은 사막, 한줄기 연기가 똑바로 올라간다. 긴 강에 둥근 태양이 지고 있다." 보이는 것은 "오늘 밤에는 또 어디서 자게 될꼬? 사막 천리 인적은 끊어졌네."
그들은 서역의 크고 이상하고 황량함에 전율을 느끼며, 시계 범위가 크게 열려서, 슬프고 고생스러워 죽고싶었던 마음이 다시 소생했다. 시정(詩情)이 샘같이 솟아올랐고, 대량의 서역(西域) 자연 풍광을 읊은 시문을 남겼다. 청 시대의 저명한 경서 연구자이자 시인인 홍길량 같은 사람은 처음 천산산맥을 보자 그 우뚝 솟은 웅장한 모습과 구름 끝에 우뚝 솟은 기세에 감탄하여, 시를 읊었다. "지맥이 여기서 끝나는가? 천산은 이미 하늘을 품고 있네. 해와 달은 어디서 머무는가? 언제나 청송 우거진 정상에 걸려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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