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민족을 멸절시키려면 반드시 그들의 언어를 박탈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언어는 민족의 역사와 기억을 연결하고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를 수호한다는 것은 바로 민족의 존엄을 보호하고 일종의 문화의 유전자를 전하는 것과 같나.
역사상 유태인은 많은 괄시와 배척을 받았고, 길게는 수십 세기 동안의 좌절하며, 정처 없는 유랑을 해왔다. 하지만, 그들은 완강하게 자기의 언어와 문화를 지켜왔기 때문에 꺼지지 않는 불을 계속 유지했고, 강인하게 맥을 연속시킬 수 있었다. 마치 고시(古詩)에 나오는 离离原上草, 野火烧不尽, 只缘疮痍满目焦土无边之下, 生命的根系依然葳蕤와 같다.
(唐代 백거이의 시: 들판의 무성한 풀은, 들불이 아무리 심하다 해도 다 태울 수 없다. 만신창이가 된 끝없는 잿더미 아래 생명의 뿌리는 여전히 무성해 있음으로)
한 때 세계를 풍미한 미국 장편 역사소설 "뿌리"는 모어(母語)를 지키려는 비장함을 잘 묘사하고 있다. 소설에서 서아프리카 대륙에서 사로잡혀 신대륙으로 팔려 온 주인공은 남부 대농장에서 짐승같이 고통스러운 노동하는 흑인 노예다. 여러 차례 도망쳤다 잡혀와 살이 터지도록 매를 맞지만, 백인 농장주가 그에게 붙여준 이름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고 자기 종족 언어 이름 갖는 것을 견지한다 --- "쿤타". 이 이름 뒤로 어른거린다. 그의 아프리카 선조들의 까무잡잡한 얼굴, 조국 감비아의 흐르는 강물 위로 넘실대는 아침 안개 ---- 작은 쪽배를 저어 아침의 고요함을 깨뜨리면, 그 소리는 강 양편의 삼림에 있는 멧돼지와 개코원숭이를 깨운다. 나무 꼭대기 사이에선 수많은 새들이 지저귀고, 왜가리는 떼를 지어 넓은 수면 위를 스치듯 날아간다.
나의 모어인 중국어의 강대한 생명럭을 나는 자랑스럽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천 년의 기나긴 역사, 재난은 연이었고, 전쟁의 재해는 그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나하나의 네모난 한자들은 바로 한 장 한 장의 벽돌이었나. 그들을 배열하여 이어 놓자, 넓고 견고한 성채가 되어 오랜 문화를 든든하게 지켜주었고, 대대로 거기서 호흡하고 살아가는 무수히 많은 영혼을 감싸 주었다. 또한 많은 이민족 침입자들을 결국 힌자의 넓고 큰 면전에 머리 숙여 승복하고, 기꺼이 받아들에게 만들었다.
하지만 훨씬 많은 민족이 불행히도 반면교사가 되었다. 언어가 멸절되고 나면, 이어서 문화가 소멸되었고 결국 민족이 쇠망하였다. 마르크스가 앞서 지적한 대로 언어는 한 민족의 최고로 안정된 요소이다. 언어는 문화의 전달자와 조성 부분으로서, 어떤 민족의 언어가 소멸되고 나면, 전체 민족 역시 멸망의 운명을 벗어나기 힘들다. 호주 토착민과 미국 인디언은 진작 두 대륙의 오랜 주인이었다. 유럽 식민자들이 들어와 짧은 일세기만에 그들의 육체뿐만 아니라 그들의 문화까지 제멋대로 유린했다. 각자 수백 개의 언어가 소멸되어, 존재조차 사라졌고 다시는 전해지지 않는다. 당시 웅건하게 말을 달리던 그들의 그림자는 가물가물한 전설과 희미한 유적을 통해서, 그리고 오늘날, 아주 작은 인디언 보호구역 의 드믄드믄한 기록에다, 상상을 더해서만 재현해 볼 수 있다.
그런 토착인의 후예들은 피부색과 용모가 그들의 조상들과 별로 차이가 없지만, 입만 열면 유창하게 영어를 말한다. 영어가 이미 그들의 모어가 되었다. 육신은 종족의 생물학적 유전자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나 문화적 결함은 그들을 뿌리 없는 인간으로 만들었다.
이런 사람들이 인류 안에서 걸어갈 때, 그들은 면목이 모호하고, 신분이 애매하다. 하나의 흔들리는 그림자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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