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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이야기

2014.철원 DMZ 마라톤대회의 에피소드

우리 마라톤 모임 남산목달(남산에서 목요일 달린다는 뜻)에서는 매년 가을 행사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철원 DMZ 마라톤대회에 간다.

나는 고즈녁하고 평화로운 철원평야를 달리는게 좋고 마라톤 코스 주변에 있는 군부대 병사들이 연도에 늘어서서 응원해주는 풋풋함이 좋아 늘 기쁘게 간다.

올해도 9월 28일 주최측에서 마련해준 무료 셔틀버스를 고속터미날에서 타고 철원 고속정에 있는 대회장에 갔다.

 

철원 DMZ 마라톤 코스는 철원 노동당사를 지나 민간인 통제선 안으로 들어가 평화로은 들판길을 달리고 다시 고석정으로 나오는 코스이다.

얼른 보면 높낮이가 별로 없는 평야지대를 달리는 코스라 쉬울것 같아도 땡볕아래 질펀한 논 한가운데를 달리다보면 지레 질리기 마련이라 기록이 잘 안나오는 코스였다. 

이대회의 또 다른 특징은 군인들이 대거 참가한다는 점과 미군들이 많이 참가하고 대회 우승상금도 미화 현찰로 주는 점이다.

 

우리는 이 대회가 끝나면 의례 대회장에서 3km쯤 떨어진 마라톤 회원의 모친 댁에가서 점심과 막걸리를 먹고 돌아왔다.

그집은 수수한 시골집으로 마당에 커다란 밤나무가 있고 등나무 그늘이 시원한데 무엇보다도 주인아주머니가 정성껏 가꿔놓은 온갖 꽃들이 언제나 만개해 있었다. 

또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시고 구수한 시골 된장국과 삼겹살로 푸짐하게 42km를 달리고 온 지친 몸을 보충해 주셨다.

조용한 시골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쉬는 편암함이 좋아 우리는 마라톤 뛰는것 반, 시골집에 가는 즐거움 반으로 철원마라톤에 간다.

 

이날도 이대회에 올때마다 늘 그랫던것처럼 기록이 시원치 않아서 4시간 57분만에 레이스를 끝냈다.

나는 철원에만 오면 언제나 덤덤하게 땡볕아래 질펀하게 일자로 뻗어있는 논길을 달리고 돌아오곤했는데 올해엔 에피소드가 하나 생겼다.

 

마라톤을 뛰다보면 속도가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자연스레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피니시 라인까지 내내 같이 가게되는 일이 많다.

20km가 넘으면 비슷한 시간에 지치고 35km지점쯤 가면 누구나 죽을 지경이되고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다리에 쥐도 나고 하는 법이다.

이날도 20km넘어 달리는데 나보다 키가 머리하나는 더크고 몸은 비쩍마른 앳된 미군 병사가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렸다.

그는 워낙 키가 커서 멀리서도 금새 알아볼 수 있었는데 큰키에 스피드는 별로 없었으나 긴 다리로 성큼성큼 힘들이지 않고 쉽게쉽게 가는듯했다.

그와 어울려 뛰는 마라토너들이 마치 아프리카 초원을 기린이 흔들흔들 가는 속도를 맞추려고 다른 영양들이 죽기살기로 달리는 모양과 비숫했다.

 

30km를 넘어서 뒤에 있던 그가 내 앞을 치고 나갔는데 50m 쯤 앞서가던 그가 갑자기 뒤로 발랑 넘어졌다.

바로 뒤에 있던 내가 걱정이되어 달려가보니 큰 위험은 아니고 단지 쥐가 난것 같았다.

그래서 얼른 그에게 다가가서 고통으로 오만상을 찌프리고 있는 그에게 어느쪽이야? 하고 물었다.

그랫더니 의외의 대답 이 나왔다. "양쪽 다!"

이런 대화가 영어로 이루어 졌다면 하나도 웃길게 없겠지만 이게 모두 한국말 대화였다는게 여간 웃기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양쪽 다리를 열심히 주물러주자 그는 쥐가 풀렸는지 부스스 일어났다.

앞서 달리던 그의 미군 동료들이 되돌아와 그를 보살폈고 나는 그를 그들에게 맡기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한국말을 한마디도 못할 것 같은 미군이 "양쪽 다!"라고 말하는게 신기했다.

 

다시 35km쯤 가는 그가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 다시 나를 추월했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이젠 괜찮아?"

그가 한국말로 정확히 존대말까지 써가며 대답했다. "괜찬아요. 마라톤을 첨 뛰는거라 그랬나봐요. 정말 고맙습니다!"

성큼성큼 달리는 그가 이미 지쳐서 형편없이 속도가 떨어진 나와 대화하느라 늦으면 아되겠다 싶어 "어서 빨리 가. 어서."라고 했다.

그는 나에게 고개를 꾸벅하며 인사를 하고 셀렝게티 초원을 달리는 기린처럼 큰 키를 흔들흔들하며 멀어져갔다.

그와 나는 서로 아무 것도 모르는 남남이지만 이일은 우리모두에게 에피소드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