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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여행

열하 기행(热河纪行) 여섯째날 (심양 : 장학량 저택과 송경령 자매)

어제는 산해관에서 동차를 타고 심양에 와서 조선족과 한국사람이 몰려 산다는 서탑거리에 있는 민박집 (아파트 독채)에 짐을 풀었다.

서울에서 미리 예약한 집인데 몇년전 백두산 배낭여행 갈때 신세졌던 아담스민박 집이다.

 

심양북 역에서 서탑거리까지 택시를 타고 올때 에피소드.

역에 내리니 택시 정거장에 택시가 서너대 있는데 도무지 갈 샐각을 안했다.

우리가 배낭을 메고 두리번 거리는데 그중 한 택시기사가 잽싸게 오더니 어디 가냐고 한다.

서탑거리 (씨타지에!).가자고 하자 100원 내란다.

내가 어이가 없어 크소리로 웃었더니 그는 겸연쩍게 가버렸다.

조금있다 다른 기사가 와서 50원을 불렀다. 내가 "15원"! 하니까 이번에는 그가 코웃음을 치며 가버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빈 택시는 안왔다.

하는 수 없이 아까 50원 부르던 택시기사에게 가서 30원에 가자며 15원 거리 아니냐 했더니 차가 막혀서 그런다며 봐주는척 그러자고 했다.

실제로는 하나도 차가 막히지 않았다.

서울 택시나 중국 심양 택시나 다 먹고 살자니 박아지도 씨워야 하고... 사람 사는것은 똑 같다.

 

                  --- * ---

 

오늘은 2014년 9월 15일. 벌써 한국을 떠난지 벌써 엿새가 지났다.

아침에 일어나니 날씨도 쾌청하고 기온도 선선하여 기분 좋게 오늘 일정에 나섰다.

오늘은 심양고궁, 북릉공원, 장학량 저택과 그 앞에 있는 은행(장학량의 금고)을 보고 고속버스를 타고 대련까지 가야한다.

 

근처 조그만 식당에서 아침을 대충 먹고 고궁으로 버스를 타고 갔는데 웬일인지 문표를 팔지 않았고 경비에게 물어보니 1시 넘어 오라고 한다.

하는 수 없이 먼저 장학량 저택부터 가기로 했다.

 

장학량 저택은 시내 한복판에 있었다.

장학량(1901~2001)은 랴오닝성 태안에서 봉천 군벌 장작림의 맏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대를 이어 군벌이 되었고 장개석의 부하였다.

그는 서안사변 을 일으킨 장본인이라 공산당으로선 고맙기 그지 없는 터라 저택을 잘 보전하여 놓았고 존경과 감사를 표시하는 안내판을 써 놓았다. 

서안사변이란 일본군보다 공산당부터 먼저 섬멸하려는 장개석을 장학량이 서안에서 구금하고 국공합작(국민당과 공산당이 협력 일본군에 대항)을 강요한 사건으로 공산당쪽 주은래와 남경정부 쪽 송미령의 협상으로 장개석은 구금에서 풀려났고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공산당이 기사회생 했다고도 볼수 있다.

그는 훗날 장개석에게 체포되어 장개석이 1949년 대만으로 쫏겨 갈때 끝내 대만으로 데려가 1991년까지 가택연금 당했고 이후 해외 출국이 허용되어 미국 하와이에서 2001년 10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서안 사변을 일으킨 동기는 그의 아버지인 만주 군벌 장작림이 일본 관동군에 의해  기차를 타고 가던중 폭사 당했기 때문이다.

중국 당국은 장학량 저택 관광을 통해 인민들에게 중국 근대 역사 교육을 시키려고 당시 신문 기사와 유물을 전시해 놓았고 송경령자매에 관한 전시도 해 놓았다.

 

중국 근대사에 빼 놓을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한 송경령 자매를 간단히 소개한다.

광동성 재력가인 송가수는 12세에 미국에 건너가 감리교 목사가되었고 상해에 돌아와 정착했다.

상해에 돌아온 이후 그는 목사를 그만두고 기계 수입등 사업을 하여 큰 돈을 벌어 광동성의 유력 재산가가 되었다.

그는 송애령, 송경령, 송미령이란 세 딸이 있었는데 이들을 아들과 평등하게 미국 유학등 교육을 시켰다.

송애령은 공자의 직계 후손인 대부호 공상희와 결혼하였고,송경령은 중국 혁명의 아버지 손문의 혁명동지이자 부인이 되었으며 막내 송미령은 장개석과 결혼하였다.

중국인들은 송애령은 돈과 결혼했고, 송경령은 조국과 결혼 했으며, 송미령은 권력과 결혼했다고 말한다고 한다.

손문은 공산당정부, 대만정부 모두에게 중국의 국부로 추앙받는 인물이며 그의 비서였던 송경령은은 손문이 49세때 22세의 나이로 그와 결혼했다.

 

 

 송애령(쑹 아리링), 송경령(쑹 칭링), 송미령(쑹 메이링) 자매 - 요새 기준으로는 별로 뛰어난 미모 같지는 않다.

다. 

 

장학량 저택 앞 광장에 세워져있는 장학량 동상.

 

장학량 동산 앞에서 기념사진

 

장학량은 중국의 유구한 역사상 큰별이며 비록 세간의 평가는 일치하지 않으나 영원히 기억될 중요한 인물이라고 잔뜩 치켜세운 비문.

 

입구에는 중국식 건물이 있었는데 화려했다.

 

기둥을 받친 주추돌 마다 화려한 사자상을 조각해 놓았다.

 

주춧돌에 새겨진 사자상.

 

단정하고 깔끔한 치파오를 입은 안내 도우미 아가씨들이 가벼운 소동을 벌이며 몰려들기에 뭔가 궁금하여 따라가 보았다.

 

그랫더니 토끼만한 고슴도치가 컴컴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화려한 서양식 본관 건물

 

실내 모습.실물대 인물상을 만들어 놓았다.

 

현관 입구에 앉아서.

 

2층 실내.

 

 

실네에 전시된 말 조각상

 

당시 상황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장학량 자녀들이 학교에 타고 다녔다는 마차.

 

장학량의 사금고였다는 은행을 재현해 놓았다. 손님과 직원을 실물 그대로 사실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마네킹 사이에 서서 기념사진.

 

현금 수송 마차 모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