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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여행

백두산 배낭여행 (여순감옥)

여행 마지막 일정은 여순 감옥이다.

어느 여행기에서 보니까  외국인은 여순감옥 관람이 허용되지 않아서 하는수없이 중국인 단체 관광에 슬쩍 끼여서 한국말은
한마디도 않하고 중국인인척 하면서 구경하고 왔다고 해서 대련 민박집 주인에게 과연 그런지 물었더니 그는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알아 보더니 아직 관광이 허용되지 않으니 여순감옥까지 가서 만일 입장이 안되면 50위안 지폐를 문지기에게
슬쩍 쥐어주어서 그가 받으면 관람이 가능하고 아니면 그냥 올 수밖에 없단다.
 
여순은 대련에서 차로 2시간정도 가야되는 먼 곳이라 만일 거기까지 갔다가 구경도 못하고 그냥 오게되면 큰 낭패였기에
한참 망설인 끝에 "에라 원래 스케줄대로 밀고 나가다 안되면 할 수 없다."결단을 내려서 민박 주인에게 말해서 여순까지 왕복
250원에 봉고차를 대절해서 갔다오기로 했다.

젊은 중국인 운전기사는 여순감옥에 한국인도 입장이 되느냐 물으니 이제는 아무 문제 없다며 우리를 안심 시키고 안중근을
아느냐 물었더니 "안충건"물론 안다. 국민학교 책에도 나온다고 했다.

시원한 고속도로 같은 4차선도로를 두시간정도 달려 여순 감옥까지 갔다.
여기서는 여순감옥이라 부르지 않고 여순일러감옥유적지라고 부른단다.
러시아와 일본이 감옥으로 사용했던 곳이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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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감옥 행정동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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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감옥 입구 ( 아무 문제없이 통과. 입장료가 20원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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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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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관람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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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러시아가 85간의 감옥 착공
1904-1905년 러일전쟁때 병원과 병영으로 사용
1907년 일본으로 넘겨져서 감옥으로 사용되고 감방,병방,검신실등 증축
1920년 관동청감옥으로 개칭 - 사형장 노역감리실 증축
1939년 여순형무소로 개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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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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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감방마다 수형자들의 번호표가 걸려 있다. 문패처럼.


감방은 11-15평방m로 똑 같지는 않은데 평균 7-8명이 수감되었고 벽에는 일본,조선,중국 3개국어로 감옥 규칙이 붙어있고
여름에는 무지 덥고 겨울에는 무지 추웠다고 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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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벽에 붙어있던 3개국어로 써있는 감옥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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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감옥에서 제일 자세히 4개국어로 소개한 안중근의사 설명 안내판. 이런 안내판은 여순감옥에서 안의사 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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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가 머물었던 곳.(형무소장방 바로 옆방에 국사범으로 특별 대우했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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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가 수감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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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방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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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뢰 (캄캄한 감방) -  2.4m의 반항적이거나 감옥규율을 위반한 수감지를 가두었는데 캄캄해서 손을 뻗으면 다섯손가락이 안보였다. 벽에 겨우 간수가 감시하기위한  원형 구멍이 하나 있는데 안은 크고 밖은 작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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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들이 서로 못 알아보게 하려고 머리에 씌우던 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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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수감자에게 죄수번호가 매겨지는데 이것은 그중 부분호패(번호표)라고 써있는데 부분호패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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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에 채웠던 쇠뭉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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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들의 밥그릇.( 크기가 다른 7가지 밥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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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실. 고문실에는 그네(고문기구)나 호랑이걸상(고문기구)등 각종 형구가 없었으나  미결수나 옥규위반자에 대해 혹형을 가했다.

그당시 이곳의 주요 행형수단은 태형이었는데 납을 매단 대나무가지로 수형자들을 피부가 벗겨지고 속살이 찢어질때까지

때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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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고문도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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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뚱딴지 같이 우리들이 얼마전까지 쓰던 석유버너가 전시되어있다.
그때도 아마 이 석규버너를 감옥에서 사용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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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선생을 설명하는 안내판.
중국어 안내문은 조선 충청남도 출신의 저명한 역사학자, 문학가로 쓰여있으나 영어 안내에는 North Korean 이라고 되어있어 중국어 안내와 다르게 쓰여있으며 반드시 수정해야할 부분이다.
1923년 집필한 조선혁명선언에서 무장항쟁을 주장했고 1928년 대만 기륭항에서 피체되어 1930년4월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으로 이송되어 1936년 2월21일 이곳 여순감옥에서 희생되었다" 고 써있다. 

아래 부분에는  단재선생이 민중은 우리들 혁명의 핵심력량이다.폭력은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우리는 민중속에 들어가 끊임없이 폭력,암살,폭동 등을 통해서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압박과 약탈없는 이상적인 조선을 건설하자고 주장했다고 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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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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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없이도 이 곳 비밀 살인장소에서 수많은 항일지사를 처형했기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지는 모르나 1942년에서 1945년까지만 700명이상 살해되었고 1945년8월16일 일본패망 다음날에도 공산당원 유봉천,,하한청과 다른 네명이 처형되었더고 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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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 시신을 담는 나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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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재판소. 감옥에서 멀지 않은 언덕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