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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대로 산 돼지

부처님 손바닥에서 벗어나기(跳出手掌心): 2/3

만약 내가, 과학 인텔리는 인문 인텔리에 비해서, 인품이 고상하다고 말한다면, 이건 분명히 틀린 말이다. 과학 인텔리 중에도 비열한 무리들이 있다.

예를 들어, 전 소련의 라센코(1898~1976: 소련 생물 학자) 같은 자가 있다. 하지만, 나는 누가 그의 학설에 대하여 순 엉터리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무엇보다 누가 이처럼 상세한 분석을 했다고 들은 적도 없다.

리센코의 학설 가운데 어떤 오류는, 그의 비열한 내심 가운데 어떤 것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렇지만, 만약 리센코를 존중할 가치가 없다 하더라도, 리센코가 종사하던 일 ---- 생물학 ---- 은 여전히 존중할 가치가 있다.

과학에서 착오 있는 학설은 있을 수 있지만, 비열한 학설은 있을 수없다.

그래서 리센코 같은 비열한 자라도, 그가 생물학을 위해 행했던 일들을 비열한 행위였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도덕 기준을  그대로 중국 예술 논단에 규칙으로 적용하는 것은 안된다. 믿지 못하겠다면, 다른 사람들이 자핑와(贾平凹 )의 <펴도(废都)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보면 된다. 현재 중국에서, 문학은 현세(现世)를 초월하고, 인류의 일을 초월하는 것이 분명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평론하고 있는 기준은, 삼고 육파(三姑六婆:   기생 어미, 점쟁이, 여자 무당, 포주 등등 천한 일을 하는 부녀자들을 가리키는 말)가 행하는, 신변에서 일어나는 천한 일을 정하는 기준과 다를 것이 없다. 자핑와는 <폐도> 1부에서, '큰 형수는 치파오를 입고 대문을 나섰다'라고 썼는데, 우리는 옷이 예쁘지 않다는 말도 써야 하고, 그녀의 나서는 동기가 무엇인지도 써야 하고, 누구를 유혹하려는 지도 써야 한다.

그 밖에도, 어떤 남자 혹은 여자 작가가 무슨 좋은 책을 썼을 때, 그가 책에서 하는 말을 칭찬하는 것은 세상의 도의와 인심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어떤 여자가 남편을 도와 자식을 가르치고, 시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만일 내가 현재 중국 문예에 대하여, 오직 이런 기준밖에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악랄한 비방일 것이다.

뒤라스의 <연인>이 출판된 지 얼마 안 되어, 단번에 (타이완의 역서를 포함해서) 4권의 번역본이 출간되었고, 영화 <쉰들러 리스트>가 국내에서는 아직 미개봉이었을 때도 호평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우리는, 장차 후대에 전해질 이런 걸작들은 현세의 기준을 적용하지 말고, 도덕적 잣대로 평가하지도 말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기준은 중국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여기서 얻은 결론은 그렇기 때문에, 문학예술의 영역에서  외국인은 인류의 일을 초월할 수 있지만, 중국인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문학예술 및 기타 인문의 영역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분명히 두 가지 무거운 기준을 사용한다.

그것은 바로 외국인의 작품에 대해서는 예술 혹은 과학의  기준을 가지고 심사 평가하는데 반해서, 중국인의 작품에 대해서는 도덕 기준을 가지고 심사 평가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배후는, 외국인을 우리와 다른 인간으로 생각하고, 이런 그들의 성취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국인은 같은 인간으로 간주하고, 오직 주관적으로 평가한다. 이 때문에 우리의 문화 사업에서 제일 중요한 내용은 그것의 성취가 아니라, 그것의 한계인 것이다. 이런 한계를 모두가 인정하는데, 누가 감히 우르르 들고일어나 그것을 공격하겠는가? 

당대에, 맹자도 이렇게 양주와 묵자를 평가했다.

"임금도 없고 아비도 없으니, 그건 짐승이다."

현재 우리들도 <폐도>와 외국에서 상을 탄 영화들을 이렇게 평가한다. 이런 작품들이 좋은지 나쁜지는 별개로 하고, 다른 사람의 작품을 "금수 같은 짓" 혹은 " 서양 것만 맹종하는 짓"이라고 말하면 안된다.

중국인으로서, 최대의 고통은 다른 사람을 "입장을 바꾸어 이해해 주며 참는" 횟수인데, 이것은 세상 어느 나라 사람들 보다 심하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나 자신이 중국인인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뜻(나는 이일을 제일 좋아한다)은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 문화 사업 발전에 매우 불리하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들이 성실하게 예술을 평가할 때, 필요한 기준과 과학상의 기준에는 공통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현세의 이해득실에 따라서가 아니라 오직 그것이 맞느냐 틀리느냐(과학), 아름다운가 아닌가(예술)에 있다. 이런 기준을 나는 지혜의 기준이라고 부른다. 만약, 인류 외의 지능 생물이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들이 인류가 과학에서 성취한 것을 이해하는 것 외에도, 인류가 예술에서 성취한 것들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래서, 지혜가 인류를 초월한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류 외의 생물이 인류의 예술을 감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나는 감히 사람들과 내기를 걸어도 좋다. 이 생물이 유르스나르 여사의 책을 읽는다면, 어느 구절에 가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을 것이고, 인류가 가지고 있는 포부에 찬사를 보낼 것이다.

그가 <홍루몽>을 감상할 수 있을지에는 나는 오히려 내기를 걸지 않겠다.

하지만, 나는 감히 단언하는데, 이런 기준은 존재한다. 이 기준에서 보면, 인류는 다행히 지혜를 가지고 있으며, 당연히 그것을 선용하여 여러 가지 일을 성취해야 한다. 그중에는 문학예술도 포함되어야 한다.

이 기준으로 도량하면, 소설가들이 애써 쓰려는 책은 전에 없던 책인데, 이것은 과학자들이 애써 이루려는 발견과 똑같이 찬미할 가치가 있는 일이다.

당연히, 다른 기준도 있다. 그것은 자기가 개인이고, 집은 어느 골목, 몇 호에 살고, 주위에는 천한 일을 하는 아낙네 들도 있고, 당연히 법을 잘 지키며 일생을 보내야 한다. 만일 여력이 있다면, 돈도 많이 벌어야 하고, 출세도 해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란 말도 들어야 한다. 나중에 말한 기준은 개인의 행복이 달려있으니, 자연히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인텔리로서, 앞서 말한 지혜의 기준을 당연히 기억해야 한다.

* 트로핌 리센코(1898~1976): 20세기 가장 악명 높은 과학자

우크라이나 출신 생물학자로 1930년대 중반부터 소련 과학계의 핵심으로 떠올랐고, 스탈린의 총애를 받아, 생물학계를 장악했다.

그는 한 유기체가 일생 동안 획득한 특성은 그 후손에게 전해진다는 가설을 믿었고, 이원리를 그대로, 가축 사육, 농작물 재배에 적용했다.

그는 자기 학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과학자들을 숙청했으며, 레닌 훈장, 노동자 훈장을 받았다.

리센코 주의로 포장된 그의 학설은 막강한 위세를 떨쳤으나, 스탈린 사망 후 급전직하 몰락하였다.

1965년 러시아 유전학자들은 그가 소련 농업에 막대한 피해를 끼친 사기꾼이고, 소련 최고의 유전학자들이 상당수 옥고를 치르거나 사망한 것도  그의 책임이라고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