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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대로 산 돼지

<황금시대>에서 소설 예술을 이야기한다.

<황금시대>, 이 책에는 5부의 중편 소설이 들어있다.

그중 <황금시대> 한편은, 20세 시절부터 쓰기 시작하여 40세 시절에 가서야 글을 마쳤으며, 그 사이에 여러 번 고쳐쓰기도 하였다.

지금 그 당시의 초고를 다시 읽어보면, 거의 구 절 하나하나 마다 쑥스러워 진땀이 난다. 겨우 마지막 탈고한  원고에서야 다르게 느껴진다.

이 3만 자 정도되는 소설 속에는 당연히 불완전한  곳이 많지만, 읽어보고 난 다음에는 조금도 고쳐 쓰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못했다. 이것은 소설에는 이렇게 하나의 작법(写法)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지만, 비록 힘들더라도, 불가능한 건 아니다.

이 작법이란 작자 자신이 추구하는 자기만의 완성됨을 말한다. 나는 작가들마다 스스로 느끼는 완성됨이 모두 따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단지 항상 그걸 추구하지는 못하지만.

이 작법에 대해 말하자면, 뒤렌마트(1921~1990: 스위스의 독일어 작가, 극작가)는 <법관과 그의 사형집행인>을 아주 여러 해에 걸쳐 썼지만, 작품을 완성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다시 이렇게 소설을 쓰는 건 불가능하다."

이것은 그도 이렇게 썼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사람이 매 편의 작품을 모두 완벽하게 쓰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완벽하게 하는 것이 당연히 제일 좋지 않겠는가?

한 번은, 어떤 젊은 여성이 나에게 소설을 어떻게 쓰냐고 물었다. 게다가 그녀는 자기도 소설을 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는 <황금시대>를 쓰던 과정을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녀에게 어떻게 소설을 썼는지 물어보았다. 그녀가 말하기를, 소설 쓰는 게 그렇게 어려운 줄을 알았다면, 진작에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았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 이 책 안의 대다수의  장(章)과 절(节)을 모두 뼈를 깎는 노력으로 정성을 다해 쓰지는 않았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소설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이 작법을 시험해 보는 것도 좋다. 이것도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이 책, 여러 곳에서  성(性)에 대해 썼다.

이런 작법은 비난을 자초하기 쉽고, 그 자체가 세상에 영합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나도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냥 그렇게 썼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이렇게 쓴 것은 비난을 자초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세상에 영합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단지 과거 시대를 돌이켜 보려고 그런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6~70년대는 중국에서 성을 배격하던  시대이다.

성을 배격하던 시절에야, 성은 겨우 생활의 주제가 되었다. 마치 기아의 시절에는 먹는 것이 생활의 주제가 되는 것과 똑같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식욕과 성욕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했다. 사랑하고 싶은 것과 먹고 싶은 것은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이다. 만약 이걸 얻지 못하면 인간 본성에 장애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나의 소설에서 이런 장애 자체가 주제는 아니다.

진정한 주제는 역시 인간의 생존 상태에 대한 반성이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논리는 우리 생활에 이렇게 많은 장애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기랄, 정말 재밌다. 이 논리를 블랙 유머라고 부른다.

나는 블랙 유머가 나의 기질이고 천성이라고 생각한다.

내 소설 속의 인간은 언제나 웃고,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나는 이런 것이 보다 재미있다고 여겼다.

내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웃기고 매우 재미있다 등등.

이것은 본인의 작품에는 거기 맞는 독자층이 있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당연히, 몇몇 작가들은 우는 것이 사람을 감동시킨다고 여긴다.

그들의 붓끝에서,  인물들은 한 번도 웃지 잃고 언제나 운다. 이것도 하나의 작법이다. 그들도 자기의 독자 층을 가지고 있다.

어떤 친구가 말하기를, 내 소설은 여자를 감동시킨 적이 없다고 했다. 그녀가 바로 울기 좋아하는 사람이다 보니, 내 소설을 오독(误读 )하고, 실망을 느낀 것이다.

나는 독자들이 더 이상 내 소설을 오독하고, 실망을 느끼지 않게 하고 싶다.

현재 지나치게 진지한 소설 독자들은 적어졌지만, 독자들의 수준은 대단히 높아졌다.

현대 사회에서, 소설의 지위는 무대극과 같이 하나의 고상한 예술이 되었다. 소설이 독자들을 잃었다면, 그중에는 도덕교육을 받고 싶어 하는 독자, 정치 은유를 보고 싶어 하는 독자, 성(性) 억압을 느끼거나, 배설할 도랑을 찾는 독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때우려는 독자들도 포함된다.

나머지가 소설을 읽으려는 진정한 독자들이다. 소설은 작가들도 잃었다. ----  어떤 사람은 사업을 한다고 떠났고, 어떤 사람은 영화나 드라마 각본 쓴다고 떠났다. 최후로 몇몇 소설을 쓰는 진정한 사람들만 남았다. 나는 이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 1997년 제5기 <철판광각> 잡지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