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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대로 산 돼지

<삼부작 의심> 서문 (<怀疑三部曲>序): 2/3

어떤 그리스 명의(名医)가 말했다.

사람에게 좋은 술과 기름진 안주는 장(肠)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독약이다.

나는 지혜, 성애(性爱)는 없고, 게다가 재미마저 없는 생활은 받아들일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생활이 살아가는 전부이다.

그들은 말한다. 만일 '열애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런 생활 가운데 있는 규율이라 할 수 있다. ----  내가 보기에, 이런 생활 태도는 그야말로 괴벽 같다. 불행히도, 이런 괴벽한 사람이 참 많다. 어떤 사람은 이런 괴벽을 문화라고 부르기도 하며, 심지어 생활 그 자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들이 쓴 작품은 이런 정서로 기득 차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작품을 쓸 때, 남도 그러려니 하는 생각을 버릴 수 없으며, 사람들마다 모두 이런 정서를 갖기를 희망한다.

나는 이런 생각에 정말 동의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작품을 쓰면서 중요한 임무.---- 다른 사람들과 윤리 상의 토론을 하는 ---  가 하나 늘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소설에 이런 일을 쓰는 것이지만, 서언(序言)에서 몇 마디 쓰는 것은 이와는  다르다.

게다가 지혜와 성애(性爱) 그리고 재미와 관해서, 내가 좀 많은 말을 해도 되지 않겠는가?

러셀 선생은 유년기에 일종의 비관적 심경에 깊이 빠진 적이 있었다.

다섯 살 때, 그는 생각했다. 사람의 일생은 대략 70세(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말이다)인데, 불행한 나의 일생은 겨우 1/14밖에 지나가지 않았구나!

하지만 그다음에 그가 몇 가지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는 지혜란 무엇인가를 체험하였고, 이런 슬픔은 바로 구름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인간은 지혜를 얻을 수 있고, 인류의 지혜는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다.

만약이 두 가지 점을 제외한다면,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성(性)에 대해 서, 프로이트는 말했다. "그것은 모든 미(美)의 원천이다."

당연히,  미를 감상하는 데 생식기를 집중하지 않아도 되고, 그보다는 감상자로서 다른 사람의 매력을 감상하면 된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지혜와 성애(性愛)가 좋은 것임을 믿도록 설복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재미없는 사람에게 재미있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믿도록 설복할 방법이 없다.

어떤 사람은 재미있고, 어떤 사람은 재미없는데, 이런 차이는 선천적인 것이다.

1980년, 나는 대학에서, 조지 오웰의 <1984년>을 읽었는데, 이는 일생 동인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이 책과 헉슬리의 <기묘한 신세계>, 자야 타니아의 <우리들>는 유토피아 뒷면의 삼부작이라 불린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것은 이미 유토피아가 아니고, 역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말하든, 유토피아와 역사는 차이점이 있다.

전자는 발생한 적이 없고, 후자는 우리가 이미 경험한 것이 아닌가!

전자와 현실을 비교해 보면 단지 모양만 같을 뿐이지만, 후자 쪽은 부단히 되풀이되면서, 수없이 변하면서도 근본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조지 오웰의 악몽은 우리들 세상에서 그대로 이루어졌는데, 어떤 사람들이 생활에 지혜도 없고, 성도 없고, 재미도 없다고 여기는데 그 원인이 있다.

그들은 남들도 그러려니 하면서, 모든 사람은 서로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왕 사람들의 생각이 같다면, 그들의 이상을 실현시켜서 하나의 보다 철저히 재미없는 세상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둘도 없는 나를 찾아>를 썼고, <혁명 시기의 사랑>을 썼고, <홍불의 밤 나들이>을 썼다.

내가 쓴 것은 속 마음이지 외형이 아니었다. 정신적으로 같지만 외형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맹자를 숙독하고 나서 그 안에 있는 것이 전부 이런 생각들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책이 있는데, 모두 내용은 버릴 것 없이 훌륭하지만, 재미는 되게 없다. 명확히 나쁜 곳을 제외하고도, 이런 책은 사람을 해치는 곳이 있다. 즉 어떤 사람이 이런 책들에서 고무받은 나머지, 모든 생활을 재미없는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맹자는 모든 사람은 권위를 떠받들고, 그것을 평생 가장 중요한 일로 삼고, 그 가운데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점에 관하여, "실제로 즐거움"이란  책에서 증명을 얻을 수 있다.

이 권위는 집안에서는 부친과 맏형이고, 집 밖에서는 군왕과 상사이다. 현재 군왕은 당연히 없어졌으나, 여전히 상사는 있고, 여전히 의식 형태도 있다. 나는 그의 관점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돌아가신 부친을 매우 좋아했지만, 그를 떠받드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형도 매우 좋아했는데 그의 지능은 나보다 열 배는 높았으며,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알랑거렸다면, 우리는 둘 다 큰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떠받들거나 순종하는 가운데서, 즐거움을 얻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