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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대로 산 돼지

중국 인텔리와 봉건 유풍(中国知识分子与中古遗风): 4/4 (完)

 

 

三) 중국 인텔리는 봉건 유풍을 버려야 하나?

 

현재, 중국 인텔리는 사회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비판할  목표를 찾지 못했고, 찬양할 목표 역시 찾지 못했다. 오직 찾아낸 목표는 속히 대임(大任)을 우리에게 내려 달라는 호소였다. 여기서 대임이란 곧 인텔리가 지켜야 할 가치 체계에 대한 책임인데, 그것이 없으면, 인텔리의 존재 의의는 상실된다.

가치체계의 형성을 논하자면, 자연, 지리에서 생활방식에 이르기까지, 제각기 한몫의 작용을 한다. 그 작용이 사람마다에게 관련되니, 유지하는 게 좋은지, 변혁하는 게 좋은지를, 오직 인텔리에게만 말하게 할 수는 없다.

사회가 이 책임을 전부 인텔리에게 맡기려면,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 일 말고는 다른 것은 잘 못하니까"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작품을 잘 쓰니까,라고 한다면, 이유가 충분할까? 만약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모두 바보로 만드는 것이다.

내가 좋은 사람이니까? 이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에 진지한 대응이 아니다.

나는 어떤 사람은 '역사적으로 이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우리  인텔리뿐이다'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역사상, 남자는 마누라 셋, 첩 넷을 들 수 있다 했던 것은 어쩌고, 중국 여지들이 전속을 했던 것은 또 어쩌고....

우리는 이런 엉터리없고 애매한 말로 쓸데없이 욕을 먹었다.

다시 말해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되돌리려 한 것이다. 우리들 몇몇 사람은 동조하지 않는다. 어찌  말이 오가던, 기껏 '내가 확실히 잘 아니까'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 나는 오직 사유능력에 기대어 이 책임을 짊어진다는 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들은 그렇게 해도 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은 공론에 붙여야 한다.

현대 서구 인텔리는 바로 이렇게 사회문제를 토론한다.

인류의 입장에서, 과학의 입장에서, 이성의 입장에서, 가치의 입장을 다른 사람에게 몫으로 남겨준다. 우리도 이건 배울 수 있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중국 인텔리의 전통을 말한다.

당연히, 그들은 "선비(士: 공경대부와 서민의 중간에 있는 계층)"의 전통을 갖고 있다.

어느 사람은 선비는 고생스러운 일은 자기가 먼저 나서고, 즐거운 일은 남보다 뒤에 간다(비관주의자?)라고 한다. 어느 사람은 선비는 천하  모든 것이 자기 책임이라고 한다(국제주의자?).

내가 보기에는 이런 것들은 모두 전형(典型)이 아니다. 선비의 전형은 자기가 도덕이 높고  깨끗하다고 여기고(士有百行, 以德在先: 선비가 하는 모든 품행 중 덕이 으뜸이다), 지위는 숭고하며(사농공상(士农工商)에서 으뜸), 다른 사람을 가르칠 자격이 있다(教化于民: 백성을 교화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이렇게 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다.

내가 보기에는 우리는 불쌍한 축에 속한다. "바지를 벗고 자본주의의 꼬리를 잘라야 한다 (脱裤子割尾巴)  "는 식으로 오랫동안 시달린 끝에 우리는 겨우 노동자 대오에 끼일 수 있게 되었다. 가히, "이상은 높으나, 팔자는 종이보다 얇다(心比天高, 命比纸薄)"라고 하겠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우리가 "선비"의 전통을 잊어버리는 게 좋다고 주장한다. 잊지 않으려고 든다면, 그것이야말로 백일몽을 꾸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회문제를 토론할 때는, 확실한 이치를 말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을 때, 나는 알지만 다른 사람은 이직 몰라야 한다. 혹은 무슨 복잡한 문제가 있을 때, 나는 생각하면 알지만, 다른 사람은 생각해도 몰라야 한다.

바꾸어 말해서, 이것이 현대의 표준으로 표현하면, 인텔리의 능력이다.

이렇게 중국 인텔리의 특색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게 꼭 나빠진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